두산 측은 검찰 수사와는 별도로 STX 측에 대한 민사소송까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기술 유출 관련 임원들 처벌은 물론 손해배상까지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재계 일각에선 STX 측 인사들 구속이 STX의 사세 확장 과정에 대한 조사로 이어질 가능성 또한 제기하는 상황. 그동안 거침없는 초고속 성장 신화를 일궈온 강덕수 STX 회장이 제대로 된 암초를 만났다는 평까지 나돌고 있다. 두산-STX 간 기술 유출 논란의 전말과 향방을 점쳤다.
검찰이 두산중공업 출신 STX중공업 임직원 구 아무개 사장과 김 아무개 상무를 구속한 사유는 영업비밀 유출 혐의. 구 사장은 대형 공사를 위해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담수화 설비 기술’ 관련 국내 최고 전문가 대접을 받아왔으며 두산중공업이 이 분야 최고 기술 보유 기업이 되는 데 공헌을 한 인물로 알려진다.
구 사장은 두산 고문직에서 물러난 지 두 달 만인 지난 6월 STX에 새 둥지를 틀었는데 이를 전후로 20명가량의 인력이 두산에서 STX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두산 출신 핵심 인력을 확보한 STX는 곧바로 수주액이 2조 원에 이르는 사우디아라비아 라빅 지역의 담수사업 ‘라빅프로젝트’ 수주를 위한 제안서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STX가 두산의 기술을 도용했다’는 두산 측 진정이 있었고 검찰 수사 결과 구 사장과 김 상무가 구속된 것이다.
두산 측은 구 사장 등이 두산을 떠나면서 사내 기밀자료들을 USB칩 등에 담아 가져가 그대로 STX의 수주 제안서 작성에 활용했다고 주장한다. 두산이 30년간 축적한 담수화 기술을 STX가 구 사장 등의 영입을 통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로챘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STX 측은 ‘정당한 절차를 통해 (두산 출신 인사들을) 영입한 것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해당 기술은 영업기밀이라 할 수 없는 것이며 두산 인사들을 영입해 두산의 기술을 빼돌리려는 의도적 조직적 행위 또한 절대 없었다는 해명이다. 그러나 두산 측은 “검찰에 따르면 STX에서 만든 자료에 ‘DHIC’란 단어가 두 군데 나오는데 이는 옛 사명인 ‘두산 헤비인더스리 앤 컨스트럭션’의 약자 표기”라고 밝힌다. 두산 것을 그대로 베끼다 보니 벌어진 일이라는 주장이다.
현재 검찰은 “수사가 끝난 게 아니다.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수사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은 셈이다. 두산에서 STX로 건너간 인원 전체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모양이다. STX 측은 사건 초기 곧바로 반박자료를 냈었다. 이후엔 “굳이 구속 수사를 해야 하나”라고 볼멘소리를 하면서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라고 밝혔다. 법정공방 등 장기전에 대비하는 양상이다.
한편 급격히 사세를 키워온 STX가 이번 사건을 통해 성장통을 겪는 것이란 견해에도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단기간에 M&A와 핵심인력 영입 등을 통해 고속 성장해 미운털이 박혀 있던 것이 결국 이번 일의 빌미가 됐다는 지적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부실기업 인수 합병을 통해 급성장한 몇몇 기업들에 대한 특혜 시비와 배후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일부에 대해선 국세청의 세무조사 혹은 수사당국의 내사가 은밀히 이뤄지기도 했다.
두산 측 진정이 있기 전부터 검찰이 이번 건을 주시해왔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검찰 수사완료 전에 두산이 문제제기를 하는 바람에 두 명 구속에 그쳤다는 것이다. 기술 유출 수사로 시작됐지만 업계에 나돌던 STX의 M&A 관련 ‘루머’들의 진상을 파헤칠 첫 단추가 될 것이란 견해도 검찰청사 안팎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STX로선 성장사에 한 점 부끄럼이 없다 해도 수사당국이 돋보기를 들이대는 것에 대한 부담을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이번 사건은 STX의 신사업 진출에 적잖은 부담을 줄 수도 있다. STX는 STX조선의 노르웨이 크루즈업체 지분 인수, STX의 태양광 사업 진출, STX에너지의 콘도사업 리조트 설립, STX건설의 독자 아파트 브랜드 론칭 등 쉴 새 없는 확장을 해나가는 중이다. 만약 검찰의 두산 기술 유출 수사가 요란스럽게 장기화될 경우 STX 신사업들에 대한 업계의 신뢰를 보장받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STX 임원 구속 보도 이후 STX 계열사들 주가가 하락세에 빠졌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회복세에 접어들어 아직 ‘STX가 여전히 시장의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는 평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STX가 과연 두산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비관론이 STX를 긴장시키고 있다.
두산그룹은 ‘형제의 난’으로 불거진 286억 원 회사 돈 유용 재판에서 박용성-박용만 총수형제가 1심 2심 모두 집행유예를 받아내 정몽구 회장의 구속 사태를 막지 못한 현대차그룹과 곧잘 비교되기도 했다. 수년간 총수일가 재판과정에서 다져진 노하우, 기존의 법무라인 그리고 법조 출신 사외이사진 등 무엇 하나 두산에 비해 STX가 나을 게 없다는 평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법조 내공’이 달린다는 것.
10년 전 외환위기로 퇴출위기에 몰렸던 쌍용중공업을 인수한 이후 사세를 급격히 불려 순식간에 STX그룹을 20대 재벌 반열에 올려놓은 강덕수 회장이 이젠 법조 인맥을 불려야 할 때가 온 셈인지도 모르겠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