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전무의 삼성 계열사 지분 축적 관련 문건이 공개돼 삼성 측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건희 회장 | ||
사제단의 카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삼성 후계자 이재용 전무의 재산 형성 과정을 담은 ‘JY(이재용) 유가증권 취득 일자별 현황’ 문건을 공개한 것이다. 삼성에버랜드 등 비상장 계열사 지분을 싼 값에 취득해 비싸게 되팔아 거액의 시세차익을 취득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그동안 시민단체들의 문제제기와 검찰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사건 수사 등을 통해 대부분 알려진 사안이지만 김 변호사와 사제단의 궁극적 타깃에 이 전무까지 포함됐다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는 관측이다. 비자금 파문과 맞물려 이 전무의 경영권 승계와 재산 불리기 과정에 대한 도덕성 논란이 재점화될 수 있는 셈이다.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승계 시점이 임박했다는 평가 속에 이건희 회장의 속내가 타들어갈 법하다. 이 회장 입장에선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전무의 안위만큼은 지켜내려 할 것이다. 삼성의 ‘황태자 JY 엄호작전’이 어떻게 전개될지 추적해봤다.
사제단이 임채진 검찰총장 내정자를 관리한 삼성 측 인사로 지목한 이우희 전 에스원 사장은 2003년부터 4년간 에스원 사장을 지낸 뒤 지난 10월 퇴임했다. 사유는 9월 발생한 에스원 현직 직원의 강도 사건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러나 당시 재계 정보통들 사이에선 이 전 사장의 퇴임 배경을 단순히 강도 사건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시각이 퍼졌던 바 있다. 임원진 인사철이 아닌 시점에 최고경영자가 교체된 점을 들어 경남 의령 출신인 이 전 사장의 퇴임이 삼성 내 PK(부산·경남) 인맥의 입지 축소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돈 것이다. 올 12월로 예정돼 있던 이건희 회장 취임 20주년 행사 때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승계 가능성과 이학수 부회장의 향후 거취에 대한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많았던 점과 이 부회장이 경남 마산 출신인 점이 얽혀 파생된 추측이었다.
이 부회장과 더불어 재무팀 출신으로 현재 그룹 전략기획실 주축인 김인주 사장(경남 마산)과 사제단이 이종백 국가청렴위원장 로비 담당으로 지목한 제진훈 제일모직 사장(경남 산청) 등 그룹 내 요직에 상당수 PK 출신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재계 일각에선 이들 PK 인사들 중 다수를 ‘이학수 사단’으로 여겨왔다. 이우희 전 사장 퇴임으로 촉발된 PK 인맥 거취 관련 소문의 종착지가 이 부회장이었던 셈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이 소문은 이번 김용철 변호사와 사제단의 삼성 비자금 폭로로 인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이를 매년 초에 이뤄지는 삼성 임원 정기인사와 엮어 해석하려는 시각도 있다. 이우희 전 사장과 임채진 내정자가 삼성 내 주요 보직을 두루 섭렵하고 있는 부산고 출신 선후배 사이라는 점이 부각되는 것 역시 삼성 내 PK 세력의 마음을 어지럽힐 만한 대목이다.
▲ 이학수 부회장 | ||
이건희 회장 지시에 따른 정기인사 일정이 불투명해질 경우 이번 비자금 파문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인사들이 등장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지난 10일 이종왕 법무실장이 사임하면서 김 변호사를 파렴치한 인사로 규정하자 12일 사제단은 임채진 이종백 이귀남 등 검찰 수뇌부들이 포함된 로비 대상 검사 명단을 공개해 맞대응했다.
당초 이종왕-김용철 갈등 국면이 낳은 사태로 몰아가려던 삼성의 의도가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이야기가 뒤를 따랐다. 항간에는 삼성 최고위층의 입김이 이 실장의 사임을 이끌어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지만 결국 이 실장 퇴임 카드의 약발은 힘없이 사라졌다. 때문에 그룹 내에서는 물론이고 재계와 법조계 정치권, 그리고 여론이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의 인사가 책임을 져야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제일 많이 거론되는 인물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건희 회장 다음 가는 실력자인 이 부회장이다.
지난 14일 인도 첸나이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일부 언론과 만난 윤종용 부회장은 김용철 변호사를 탓하면서도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못하게 하는 것이 법무실에 있는 사람이 할 일 아니냐”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진다. 사내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보니 윤 부회장이 언급한 법무실 책임론의 화살이 이미 사임한 이종왕 실장보다는 ‘윗선’을 향하고 있다는 말마저 나도는 실정이다. 비서실 출신 이 부회장과 오랜 라이벌 관계로 여겨지는 삼성전자 출신 윤 부회장의 발언이 이 부회장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일각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삼성 측은 이학수-윤종용 두 부회장 간의 갈등설을 근거 없는 낭설로 일축한다.
재계 법조계 정치권 그리고 삼성 내부에서조차 이번 사태 파문이 대선정국을 지나 내년까지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란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검찰 수사 외에도 정치권의 특검 진행 상황 변수를 고려하면 사건 수사 장기화가 예상된다. 범여권과 민주노동당 등이 합의한 특검안의 수사기간은 최대 200일이며 한나라당 측 법안엔 90일로 돼 있다. 적어도 특검 개시 이후 석 달간은 삼성 비자금 파문 확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 민주노총이 지난 16일 삼성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이건희 회장 구속을 주장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만약 세간의 예상대로 내년 초 정기인사가 보류된 상태에서 이 부회장을 비롯한 그룹 내 PK 세력이 검찰 수사선상에 단골손님처럼 오르내리게 될 경우 이건희 회장은 어떤 생각을 품게 될까. 만약 이 부회장과 PK 출신 인사들이 요직에서 물러나는 경우를 상정한다면 그 빈자리의 상당수를 올 초 정기인사에서 약진한 이재용 전무 측근 인사들이 채울 수 있다는 관측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제단이 이 전무의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지분 취득과정을 문제 삼고 나서면서 일단락 지어진 삼성에버랜드 재판 항소심 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이 전무 지분 보유에 대한 논란이 다시 가열되고 있다. 이 회장 입장에선 경영권 승계 작업을 무작정 늦출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전무를 향한 부담스러운 시선을 잠재울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일각에선 이 전무의 개인 돈을 중심으로 한 총수일가의 재산을 출연해 삼성 주요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것을 골자로 한 지주사 전환 카드가 등장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미 삼성생명 등을 중심으로 한 금융지주사 그룹과 삼성물산 삼성전자 등을 중심으로 한 비금융지주사 그룹으로의 재편성 논의가 정치권과 관계당국 등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진행돼 온 바 있다. 삼성을 상대로 단체행동을 결의한 시민단체들 역시 오랫동안 삼성 지배구조 개선 요구 목소리를 높여왔다.
논란의 중심이 된 이 전무의 재산 중 일부가 그동안 삼성의 최대 문젯거리로 지적돼 온 지배구조 개선에 쓰이는 동시에 누군가 나서 비자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진다면 어떨까. 부정적 여론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삼성 안팎에선 이 부회장 거취를 둘러싼 갖가지 시나리오가 난무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 부회장을 비롯한 그룹 내 PK 세력의 부재가 잉태할 그룹 내 리더십 부재와 이른바 ‘희생양’이 될 세력을 다독거리기 위해 삼성이 어떤 출혈을 감수해야 할지는 이 회장의 무거운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승계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평가 속에 수사당국과 여론, 그리고 이건희 회장이 ‘같은 곳’을 향해 칼을 휘두를 가능성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