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비자금 사태가 삼성증권과 삼성물산을 흔들 경우 그룹 전체의 지배구조가 무너질 수도 있다. 사안의 중대성 때문인지 이건희 회장은 취임 20주년 기념 행사도 취소했다. | ||
그러나 이는 사태 수습 이후 언제든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더 장기적인 고민이 찾아들 것이란 관측이 삼성의 표정을 더욱 어둡게 만들 법하다. 시민단체들이 삼성 총수일가와 계열사들 간의 주식거래 내용을 꼬집고 나서자 삼성이 논란 속에서도 고수해온 현 지배구조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관측이 대두되는 것이다. 순환지배구조 핵심을 이루는 삼성생명이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까닭에서다.
경제개혁연대는 사제단이 공개한 이건희 회장 아들 이재용 전무의 유가증권 취득 현황 문건을 토대로 이 전무가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들이 동원됐다고 주장했다. 이 전무가 지난 1994년과 1995년 삼성엔지니어링과 에스원 주식 40만 주를 샀다가 1997년에 모두 팔았는데 같은 시기에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비슷한 양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전무가 600억 원대의 시세차익을 얻었다는 주장도 불거졌다. 삼성은 서류보관기간이 지나 당시 거래내역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의 한 축인 삼성생명은 그동안 ‘고객 돈을 통한 지배구조 유지’ 방편이란 비판을 받아왔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26%를 보유한 것과 관련, ‘금융계열사가 비금융계열사 지분 5%를 초과 보유할 수 없다’는 금산법 위반 논란이 정·재계를 달궈왔다. 삼성에버랜드의 삼성생명 지분 13.34% 보유에 대해선 ‘금융계열사 보유 지분의 가치가 자산총액의 절반을 넘을 경우 금융지주사로 선정돼 비금융계열사를 거느릴 수 없다’는 금융지주사법 적용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삼성생명 지분가치를 어떻게 산정하느냐에 따라 삼성에버랜드의 금융지주사 선정 여부가 갈리는 까닭에서였다.
반 삼성 정서를 지닌 정치인들과 시민단체들 사이에선 ‘삼성이 삼성생명의 지분구조 변경 대신 금산법과 금융지주사법을 완화하는 로비에 치중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그러나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발언에 이은 시민단체의 군불 때기로 삼성생명을 둘러싼 지배구조 논란은 특검의 칼날을 피해가기 어려운 실정에 이르렀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총수 일가 주식 차명관리 의혹 발언의 중심에 삼성생명이 있다는 점 또한 삼성에 부담을 안겨줄 대목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지난 11월 26일 기자회견을 통해 삼성 전·현직 임원들과 회장단이 이건희 회장 일가의 주식을 차명관리 해왔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한 임원이 삼성생명 주식 차명관리 사실을 시인했다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 주장에 대해 삼성 측은 “추측에 불과하다”며 해당 임원은 삼성생명 주식을 소유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현재 삼성생명 지분구조엔 김 변호사가 차명주식 관리인으로 언급한 전·현직 임원은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1.40%)과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3.74%), 그리고 이학수 전략기획실장(0.47%) 등이다. 이들 지분을 합하면 5.61%로 이건희 회장 지분율 4.51%보다 높다. 김 변호사 주장에 대한 검찰과 특검 수사과정에서 이 회장 지분보다도 많은 양의 주식이 차명으로 관리돼 왔을 의혹이 제기될 법하다.
삼성의 반박대로 김 변호사 발언 내용이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면, 즉 해당 전·현직 임원들 명의 지분이 맞다면 과연 삼성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지도 의문이다. 현명관 이수빈 이학수 세 사람이 지닌 지분율 5.61%는 이 회장의 삼성생명 우호지분 35.62%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만에 하나 이들이 이 회장과 이해관계를 달리할 일이 벌어질 경우 이미 13.57% 지분을 갖고 있는 신세계와 더불어 이 회장 경영권 유지에 대한 불안요소가 될 수 있는 까닭에서다.
지난 11월 26일 기자회견에서 김용철 변호사가 비자금 조성 창구로 지목한 삼성물산 역시 삼성그룹 지배구조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곳이다. 삼성종합화학(38.68%) 삼성네트웍스(19.47%) 삼성SDS (17.96%) 삼성석유화학(13.05%) 제일기획(12.64%) 삼성증권(0.27%) 삼성테크윈(4.28%) 등의 지분을 비롯해 삼성전자(4.02%) 삼성에버랜드(1.48%) 삼성카드(3.18%) 등 순환지배구조를 이루는 핵심계열사들 지분도 두루 보유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지주회사 전환 문제가 불거질 때마가 삼성의 새 지주회사 후보로 삼성물산이 꼽히곤 했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의 지시에 따라 계열사들이 비자금을 조성했다며 특히 삼성물산에 주안점을 뒀다. 삼성 계열사의 해외 구매의 대행과 그룹 내 모든 공사를 맡아서 하기 때문에 비자금 조성이 다른 계열사보다 용이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그룹 내 지주회사 전환대상 1순위 후보에서 특검수사 대상 1순위 후보로 운명이 얄궂게 바뀌어버린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