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주회사제에 대해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는 김승연 회장의 행보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 ||
지난 11월 28일 한화L&C(옛 한화종합화학)는 한화증권 주식 500억 원어치를 매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수량으로 환산하면 약 270만 주에 이른다. 한화L&C는 발표 다음날인 29일부터 12월 11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한화증권 주식 56만 8000여 주를 사들였다.
이로써 한화L&C가 소유하고 있는 한화증권 지분율은 보통주를 기준으로 6.44%에서 8.02%로 증가했다. 한화L&C는 목표로 하고 있는 지분 12.1%를 채워 최대주주로 등극할 때까지 한화증권 주식을 계속 매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한화증권의 최대주주는 한화석유화학(지분율 11.96%)이다.
한화그룹 계열사가 한화증권의 주식을 매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0월 말 공작기계 전문업체인 한화테크엠은 400억 원을 들여 한화증권 주식 140만 주를 매입했다. 지분 3.75%를 확보해 단숨에 한화증권 4대주주에 이름을 올렸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이러한 대량 주식매입에 대해 “투자를 통해 수익을 내기 위한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한화그룹이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염두에 둔 행보일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화테크엠은 한화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한화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다. 한화L&C는 한화석유화학이 10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곳. 한화석유화학은 ㈜한화가 지분 40.29%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두 계열사의 한화증권 주식매입은 계열사 차원이 아닌 ㈜한화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화는 김승연 회장이 20.97%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어 이를 통해 사실상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현재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한화가 흩어진 한화증권 지분을 정리해 새롭게 출범할 금융지주사에 넘긴다는 것이다. 한화증권의 주식을 특정 회사가 가지고 있으면 금융지주사 출범시 지분정리에 들어갈 세금이나 비용 등을 미리 줄일 수 있다는 것. 또한 ㈜한화를 중심으로 지분이 모여 있어 금융지주사로 넘길 때 절차도 비교적 간편해졌다.
막대한 돈도 챙길 수 있을 것 같다. 한화증권이 금융지주사에 편입되면 안정된 지배구조 특수를 탄 주가 상승이 전망된다. 따라서 ㈜한화로서는 금융지주사를 통해 한화증권을 지배할 수 있으므로 향후 한화증권 지분 매각에 따른 막대한 차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이 현금은 결국 ㈜한화의 다른 계열사 추가 지분 매입에 활용돼 김 회장의 그룹 장악력을 높여줄 수 있다.
하지만 한화가 당장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밑에서 지주회사제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다른 한 곳에서는 지주회사를 늦추려는 듯한 움직임이 포착됐기 때문.
㈜한화는 지난 11월 28일 계열사인 한화건설 주식의 유상증자에 참여해 800만 주를 3000억 원에 취득하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한화는 이 유상증자가 한화건설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재계 인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랬을까.
지난 9월 초 일본 오릭스는 자사가 보유한 대한생명 지분 17%를 한화계열사들에게 전량 매각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한화건설이 오릭스가 내놓은 지분 전부를 매입했다. 당시 한화 측은 “한화건설 자금여력이 가장 풍부하다”며 그 배경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화건설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대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한다고 밝힌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한화건설을 돕기 위한 움직임은 다른 곳에서도 감지됐다. 한화그룹은 지난 12월 3일 한화종합에너지라는 회사를 설립한다고 공시했다. 증기와 전기를 생산하고 판매를 목적으로 한다는 이 회사는 김승연 회장의 아들들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한화S&C가 70%의 지분을 가지고 있고 한화건설이 나머지 30%를 차지하고 있다.
한화종합에너지는 회사설립 4일 만에 ‘큰일’을 해냈다. 한화건설이 가지고 있는 전라북도 군산시 일대의 부지를 100억 원가량을 들여 사들인 것. 이를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자본금 5000만 원에 불과한 한화종합에너지를 한화그룹이 설립한 데에는 뭔가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것 아니냐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즉, 9월에 오릭스의 대한생명 지분을 인수한 한화건설을 돕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한화건설의 대한생명 지분 매입이 넉넉한 잔고를 바탕으로 한 돈 씀씀이는 아니었던 셈이다.
㈜한화가 아닌 한화건설이 나서 대한생명 지분 17%를 매입한 이유는 뭘까. 재계에서는 ㈜한화가 당장에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라고 관측한다. ㈜한화가 대한생명의 지분을 인수하면 자회사의 지분가액은 상승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상반기까지 자산총액 대비 자회사 지분가액이 49%였던 것이 더욱 올라간다. 공정거래법상 자회사의 지분가액이 50%가 넘으면 지주회사로 전환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지주회사로 전환하기엔 준비가 덜 됐을 뿐 아니라 실탄도 부족하다는 것이 한화의 판단으로 보인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한화건설이 대신 총대를 멨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래서 지금 그룹차원에서 한화건설에 보상을 해주고 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한화로서도 전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시기상조인 지주회사 전환도 피하면서 대한생명 지배력은 한화건설을 통해 강화할 수 있기 때문. 한화건설은 ㈜한화가 지분 100%를 가지고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한화그룹이 예금보험공사와의 싸움이 끝나면 지주회사 전환에 박차를 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화그룹은 예보와 대한생명 지분 16%를 놓고 싸움을 벌여왔다(<일요신문> 735호). 법정공방으로까지 비화됐다가 대법원이 한화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예보가 국제상사중재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한 상태여서 양측은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만약 한화가 승리하면 한화는 대한생명 지분 16%를 추가로 인수할 수 있어 대한생명 지분 67%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보복폭행 사건 이후 요양 차 일본에 있는 김승연 회장이 지주회사제에 대해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는 만큼 최근 한화그룹 내 자금흐름 역시 김 회장 뜻에 따라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회사 관계자도 “김 회장이 비록 ㈜한화나 한화건설의 대표이사직에서는 사임한 상태지만 회사의 최대주주로서 주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이 올해의 악몽을 털어내고 그룹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도 지주회사 전환은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지난 15일 비밀리에 귀국한 김 회장의 행보에 많은 이들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