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 치러진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영결식 차량이 회사를 빠져나가는 모습. | ||
그런데 PVP의 최대주주 등극을 계기로 한진해운 지배권을 둘러싼 한진 총수일가 내 미묘한 갈등기류와 연결 지으려는 시각이 대두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진은 이미 총수일가 4형제간 기업 분배를 ㈜한진·대한항공(조양호)-한진중공업(조남호)-한진해운(고 조수호)-메리츠금융(조정호) 형태로 이뤄놓았다. 이 중 유일하게 장남 조양호 회장으로부터 계열분리를 하지 못한 한진해운은 커다란 지분구조 변동이 있을 때마다 구설수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한진해운은 공시를 통해 지난 12월 14일 PVP가 신주인수권부사채(BW) 1274만 주(지분율 15.09%) 중 789만 8800주(9.92%)를 주식으로 전환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PVP는 종전까지 최대주주였던 대한항공(지분율 6.04%)을 누르고 단숨에 한진해운 최대주주 자리를 꿰찼다.
PVP가 보유 중인 잔여 BW 5.17%를 모두 주식으로 전환할 경우 지분율 15.09%가 된다. 대한항공 외에 ㈜한진(0.01%)과 한국공항(3.90%)등 우호세력 지분을 모두 합해도 조양호 회장이 한진해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은 9.95%에 불과하다. 고 조수호 회장 미망인 최은영 부회장의 우호지분은 10.80%다. PVP가 마음만 먹으면 한진 총수일가의 한진해운 경영권마저 위협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진해운이 지난 2001년 PVP와 BW 계약을 맺을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PVP의 경영권 공격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지난 2001년 12월 한진해운은 PVP와 미화 5000만 달러(당시 원화 645억 원 상당) 규모의 BW 계약을 맺었다. 그해 한진해운은 4조 6000억 원 이상의 매출액과 2500억 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올렸다. 한진해운 경영에 645억 원 수혈이 절실했다기보다는 다른 필요에 의해 계약이 맺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추후 PVP가 한진 총수일가의 경영권을 위협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협약이 오갔을 것이란 지적이다.
이렇다 보니 PVP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우호세력으로 삼느냐는 점이 더욱 관심을 끌게 된다. 최대주주 역할을 해온 조양호 회장과 조수호 회장 유족을 갈라서 보는 시각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2006년 11월 조수호 회장 타계 직후 미망인 최은영 부회장은 한진해운 대주주로서의 역할을 하더라도 실질적 운영은 전문경영인 박정원 사장이 주도할 것으로 관측됐다. 최 부회장의 경영경험이 일천한 까닭에 재단법인 양현 활동에 주력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이는 곧 한진해운이 조양호 회장의 영향력 아래에 놓일 것이란 관측으로 이어졌다. 지난 2006년 유산 분배 관련 한진 총수 형제간 다툼이 벌어질 당시 2남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4남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 연합에 대항해 장남 조양호 회장과 3남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한편에 선 바 있다.
분쟁이 일단락된 이후 한진중공업과 메리츠금융은 한진으로부터 계열분리를 마쳤지만 한진해운에선 여전히 조양호 회장 우호세력이 최대지분을 행사해 왔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한진과 계열분리를 하지 않은 고 조수호 회장의 한진해운은 사실상 조양호 회장의 한진 계열로 여겨져 왔다.
▲ 조양호 회장(왼쪽), 고 조수호 회장 | ||
이것이 최 부회장 측의 현금 필요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시아주버니인 조양호 회장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양호 회장의 한진해운에 대한 지분율은 그대로인 동안 최 부회장의 ㈜한진에 대한 영향력이 눈에 띄게 감소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런데 최은영 부회장의 최근 행보에서 한진해운 경영에 대한 강한 애착이 묻어나 세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2007년 3월 부회장직 취임 당시 최 부회장의 활동반경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재단법인 양현의 기금 전달 같은 공익활동에 그친 초기와는 달리 한진해운 직원들과의 접촉을 늘리는 등 경영 현안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다.
2007년 5월 16일 창립 30주년 기념식 참석을 시작으로 6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아시아지역본부 설립 행사에 참여해 남편이 생전에 친분을 나눴던 항만 관계자들과 일일이 안면을 익혔으며 현장을 직접 찾아 직원들에게 음식을 돌리며 손을 잡아주는 일도 잦아졌다. 최근엔 직원들과 함께 미술관 관람이나 저녁 식사 등을 격의 없이 나누며 사내 민심을 빠르게 얻어가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11월 한진해운 자사주 82만 주가 최 부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법인 양현에 증여된 점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양현은 조수호 회장 사후 그 유산 등으로 만들어진 공익재단이다. 이를 두고 조수호 회장 유족이 한진해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증여세 부담이 없는 공익재단을 설립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이쯤 되다 보니 호사가들 사이에선 최 부회장과 조양호 회장 사이에 한진해운 지배권을 둘러싼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마저 등장한 상태다.
이런 까닭에 직접 경영 참여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PVP의 지분이 과연 누구의 입김을 더 세게 받게 될지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아직 전체 BW의 주식 전환을 마치지 않은 PVP가 행여 조양호 회장이나 최 부회장 중 한 사람의 편에 설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는 재계 인사들은 PVP 행보에 따라 한진해운을 둘러싼 총수일가 내 갈등 가능성을 엿보는 것이다.
일부 대기업 정보통들은 최은영 부회장이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여동생 신정숙 씨의 장녀인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한진과 롯데가 한진해운을 둘러싼 갈등을 벌일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 사후 현대그룹 지배권을 놓고 미망인 현정은 회장이 시숙부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 그리고 시동생이자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몽준 의원과 갈등을 겪었던 과정을 들여다 볼 필요도 있다. 현 회장이 친정의 지원을 받는 점을 들어 ‘정씨 현대냐, 현씨 현대냐’란 논란이 불거져 범 현대가 내 갈등설을 부추겼던 것이다.
조양호 회장 측은 한진해운이나 최 부회장 측과의 갈등설에 대해 극구 부인을 해왔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벌어지는 한진해운의 지분구조 변동 때문에라도 한진 총수일가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는 호사가들의 짓궂은 상상력은 좀처럼 식지 않을 전망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