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 27일 농협 중앙회장 선거가 있던 날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사람들. | ||
“대통령 선거는 이미 끝났지 않습니까. 또 무슨 선거요?”
전북에서 15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한 농민에게 농협중앙회 회장선거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회장을 선출한다는 사실을 아예 몰랐던 것. 이런 상황은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일 듯싶다. 그만큼 농협중앙회 회장선거는 일반 농민들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지난 1988년 농민을 대변해야 한다며 민선회장을 뽑기 시작한 취지가 무색해 보였다.
농민들의 이러한 반응은 어쩌면 농협이 자초한 것일지도 모른다. 농협이 농민들을 위한 경제사업보다는 ‘돈벌이’가 쏠쏠한 신용사업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 실제로 지난해 농협에서 신용업무가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육박한다. 한 농민은 “농업사업과 관련해 담당자와 통화를 하려면 기다리다 지친다. 그런데 대출상담은 바로 연결이 되더라”며 농협을 비난했다. 2007년 농협이 야구단을 인수하겠다고 하자 대다수 농민들이 반발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지난 11월 구속된 정대근 전 회장을 포함해 세 명의 민선회장이 모두 비리로 구속된 것도 농협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과 무관심을 키웠다. 즉 누가 되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체념인 셈. 농협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내부에서조차 회장이 바뀌어도 뭐가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치러진 농협중앙회 회장선거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투표권이 있는 조합장들을 제외하고는 선거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후보자가 누구였는지를 투표당일에 알게 된 조합장도 있었다. 그만큼 농협회장 선거는 폐쇄적으로 진행됐다. 여기저기서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라는 말이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농협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회장선거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선거운동방법을 현실화하자는 주장이 많다. 현행 농협중앙회 정관에 따르면 회장에 입후보한 이들은 일체의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다. 오직 후보자의 공약과 프로필이 담긴 인쇄물을 작성해 투표 4일 전까지 각 지역 조합장들에게 발송할 수 있을 뿐이다.
많은 농민단체들은 “전화통화만 해도 불법이다. 초등학교 회장 선거도 유세를 하는 마당에 국내 최대 조직의 수장을 뽑는 선거를 이런 식으로 해서야 되겠느냐”며 선거방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들은 최소한 공개토론회라도 열어 후보자들의 공약을 제대로 비교해봐야한다고 주장한다.
▲ 이번에 선출된 최원병 당선자. | ||
이 관계자의 말처럼 농협중앙회 회장이 그렇게 대단한 자리일까. 지난 2005년부터 회장직은 비상근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농협중앙회의 정관을 보더라도 주요 업무에 대해서는 위원장 혹은 전무이사에게 위임·전결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각 부문 대표와 자회사의 사장 인사권 및 예산편성 등을 쥐고 있다. 실질적인 핵심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 더군다나 연임제한도 없다. 또한 내부통제를 하도록 되어있는 ‘준법감시인’의 경우 회장이 임면하도록 되어 있다.
권한은 많고 통제는 없다 보니 회장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총자산 240조 원, 한 해 수익만 1조 원에 달하는 중앙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 중앙회뿐이 아니다. 회장은 막대한 자금을 무기로 전국의 지역조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돈이 필요한 조합에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장에 한 번 당선되면 연임을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선제로 뽑히는 조합장도 중앙회의 지원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업을 잘해 이익을 많이 내야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선거도 자기 쪽 사람을 회장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일단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회장이 되면 그 조합장은 든든한 ‘빽’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전농 관계자는 “후보등록부터 치열한 기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일단 후보가 정해지면 그 후보를 당선시키려 모든 수를 동원한다. 그 후보가 당선되면 자신에게도 엄청난 혜택이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며 “이번 선거도 공식 선거일 전에 많은 비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번에 입후보한 후보들을 보면 지역 조합장끼리 미리 합의했음을 알 수 있다. 조합장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데 서울 경기 전남 경북 경남에서 각각 1명씩 나온 것이다. 내부조율을 거친 후 한 명의 후보를 내서 자기 지역의 조합장이 당선되도록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에 대해 전북의 한 조합장은 “그런 일은 없다. 후보자의 이력이 담긴 인쇄물과 투표당일 후보자의 정견발표로만 회장을 선출한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지역후보를 내기 위해 단일화를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번에 후보로 나온 김병원 남평농협 조합장도 강성채 순천 조합장과 치열한 물밑경쟁을 통해 전남의 지역 후보로 나왔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현행 농협중앙회 정관을 어긴 것. 정관에 따르면 회장이 되고자 하는 자는 90일 전부터 다른 조합장을 만나서는 안 된다. 만나지도 않고 단일화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회장 선거를 조합장이 뽑는 간선제가 아닌 직선제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부에서는 비용과 시간을 이유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만, 농협 개혁의 절실함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아 보인다. 직선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회장이 농민을 위한 개혁에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표’를 의식해 조합장들의 눈치만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굳이 농민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조합장들을 위한 공약만 잘 내걸면 당선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입후보한 후보들도 투표당일 정견발표에서 ‘조합장 전용차량 제공’ ‘조합장의 농협 자회사 사장 임명’ 등 조합장들을 위한 공약을 앞다퉈 내건 것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