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실은 14일 미국 브라질 캐나다 등을 포함한 17개국에서 4~5월 도입분으로 1억 1800만 배럴의 대체 원유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어 전략경제협력 대통령 특사로 카자흐스탄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를 방문한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15일 올해 말까지 원유 2억 7300만 배럴 도입을 확정했고 나프타도 최대 210만 톤(t) 추가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단기 대응을 넘어 연말까지 이어지는 대체 공급망 확보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국내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수출 물량을 줄여나가며 버티고 있는 정유업계는 어려움이 당장 해소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민간 정유사들은 스팟 시장에서 대체 물량을 급히 확보하며 버티고 있다. 정부가 확보했다고 발표하는 물량도 실제 언제, 어떤 방식으로 들어오는지 알 수 없고 현재로서는 민간 정유사들과 구체적으로 협의 중인 내용도 없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조달 비용 부담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스팟 물량은 장기계약이 아니라 필요할 때 단건으로 조달하는 물량이다. 통상 가격 경쟁력이 있을 때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지금은 중동산 원유 공급 차질로 전 세계가 동시에 대체 물량 확보전에 뛰어들면서 가격이 크게 오른 상황에서도 스팟 도입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 업계 설명이다.
업계가 특히 곤혹스러워하는 대목은 단순한 물량 부족이 아니라 유종 차이다. 국내 정유공정은 중동산 중질유를 중심으로 경질유를 일정 비율로 섞어 투입하는 방식에 맞춰 운영돼 왔다. 안국헌 대한석유협회 지속가능경영실장은 “우리나라의 원유 처리 시설은 중간 정도의 원유 성상에 적합한데 경질 원유를 많이 처리하게 되면 생산성이나 효율성이 많이 저하된다”고 설명했다. 미국산 WTI처럼 경질유 비중이 높은 원유만으로는 기존 공정을 예전처럼 안정적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얘기다.
정유사들은 원유를 투입할 때 중질유와 경질유를 최적의 비율로 섞는 이른바 블렌딩을 통해 수율을 맞춰 왔다. 이 비율을 어떻게 조정하느냐가 각 사의 정제 효율과 수익성을 좌우하는 핵심 노하우로 꼽힌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들이 통상 중동산 중질유를 60~70%가량 쓰고 여기에 경질유를 섞어 공정을 운영한다. 지금 중질유가 없기 때문에 단순히 경질유 물량을 늘리는 대신 기존 중동산과 성상이 비슷한 대체 원유를 찾는 데 더 공을 들이고 있다”며 “캐나다나 멕시코산 일부 원유가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국가별로 조달 여건이 달라 충분한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비축유 스와프 제도를 꺼내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업계 설명을 종합하면 정유사가 해외에서 경질유라도 먼저 확보해 오면 정부가 비축 중인 중동산 원유와 맞교환해 공정에 맞는 유종을 우선 쓸 수 있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4월 14일 기준 국내 정유사들은 3200만 배럴의 비축유 스와프를 신청한 상태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민간의 물량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정유업계 다른 관계자는 “정부가 그냥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 사가 타국에서 물량을 계약하고 그걸 증빙해야 스와프가 되는 구조다. 수송 차질 등으로 물량 확보가 늦어지거나 유종 차이가 있을 때만 활용할 수 있는 교환 방식”이라며 “결국 민간의 확보량이 관건이다. 평시 물량을 대체할 만큼은 안 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석유화학업계도 원료인 나프타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전체 나프타 물량 중 45%가 수입산이고 이 가운데 중동산 비중이 77%에 달한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해당 물량 수급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수입 물량뿐 아니라 정유사를 통해 국내에서 조달하던 나프타도 원유 확보난의 영향을 받으면서 수급 문제가 생겼다. 정부가 최대 210만t의 나프타 추가 확보 방안을 내놨지만 한 달 치 물량에 불과해 현장에서는 역부족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석유화학업계는 가동률을 낮추거나 일부 공장 셧다운까지 검토·실행하는 단계까지 내몰렸다.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전 세계가 동시에 중동산 대체 물량 확보에 나서면서 가격도 급등했다. 전쟁 전 수백 달러 수준이던 가격이 현재 1200달러까지 뛰고 프리미엄도 크게 붙으면서 석유화학업계가 원료 수급과 가격 양면에서 직격탄을 맞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공급처 다변화가 만능 해법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준환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자원정책연구본부장은 “중동이 지정학적으로 위험하다는 건 1970년대부터 알았고 그때부터 도입선 다변화를 계속 해왔지만 많이 내려갔을 때도 60% 이하로는 못 내려갔다”며 “지금도 결국 경제성 때문에 중동 물량을 많이 가져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기 때마다 공급선 다변화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평시에는 다시 가격 경쟁력이 높은 중동산 원유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의미다.
2010년대 80%를 웃돌았던 국내 중동산 원유 의존도는 이후 원유 도입선 다변화 지원 제도 등이 시행되면서 현재 비중을 69% 수준까지 낮췄으나 여전히 비중이 절대적이다. 중동산 원유가 상대적으로 근거리에 있어 운송 부담이 적고 공급 물량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특히 200만 배럴의 원유를 적재할 수 있는 초대형 유조선(VLCC)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운송 효율이 높아 각광받았다.
북미나 아프리카 호주 동남아 등 다른 지역은 대체 수급선으로 거론되지만 중동을 본격적으로 대체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미국산 원유는 국내 도착까지 55~60일가량 걸려 중동산보다 운송 기간이 훨씬 길고, 동남아 지역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브루나이 등 산유국이 있지만 매장량과 공급 규모 면에서 중동과 비교하기 어렵다. 평시에 이들 지역에서 나는 원유로 중동산을 대체하려고 할 경우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비축유 확대 역시 비슷한 딜레마다. 정준환 본부장은 “1980년대부터 비축을 실시했는데 40여 년 동안 위기 시에 비축유를 방출한 경우가 4~5번밖에 안 된다”며 “1억 배럴 가까운 물량을 유지하고 시설을 운영하는 것도 다 비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향후 석유 수요가 줄어들 것 같은데 지금보다 더 많이 쌓는 게 능사인지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업계도 장기적인 다변화 필요성에는 공감했으나 시장 상황이 정상화되면 다시 가격 경쟁력 논리에 밀릴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앞서의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이번 일을 계기로 중동산 의존 비중이 너무 높았다는 점에서 향후 다변화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가격 문제”라며 “정상화 이후에도 그 비싼 구조를 계속 감당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중동산 원유 공급 정상화 시점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설령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해제되더라도 곧바로 수급 불안이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봉쇄 해제 직후 선박이 출항하더라도 국내 도착까지 20일 안팎이 걸려 정상 물량이 들어오기까지는 사실상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에 생산·선적시설이 훼손까지 더해지면서 중동산 원유 수급은 상당 기간 불안정한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추가로 할 수 있는 대응으로는 수요 관리 강화가 거론된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리스크 헤지가 쉽지 않은 구조이고 지금은 스팟시장에서도 물량 구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원유 확보 노력과 함께 소비를 줄이도록 유도하는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가격은 원래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사용을 줄이게 만드는 수단인데 정부가 최고가격제 시행으로 가격을 눌러 그 기능을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격을 정해 압박하면서 정유사들에 더 많은 물량을 구해오라고 주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조달 여력까지 떨어뜨리는 방식의 대응은 적절하지 않다”고 제언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