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삼성 회장과 이명박 당선인이 지난 12월 28일 전경련에서 열린 간담회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삼성의 ‘이명박 코드 맞추기’는 지난 12월 28일 전경련에서 열린 이명박 당선인의 경제인 간담회부터 본격화됐다는 평이다. 10월 2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삼성 비자금 기자회견 이후 두문불출해온 이건희 회장이 두 달 만에 모습을 드러내 주목을 받은 것이다.
11월 19일 이병철 선대회장 20주기 추모행사장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12월 5일 예정된 취임 20주년 행사도 취소한 이 회장의 외부행차가 눈길을 끈 셈이다. 이날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이 당선인의 친 기업 성향 과시로 인해 이 회장을 위시한 재벌 총수들은 ‘말이 통한다’는 느낌을 갖고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새 정부와 이 회장 간의 코드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시민단체였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2일 논평을 통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인수위) 자문위원에 이름을 올린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과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 지승림 전 삼성중공업 부사장을 거론하며 ‘새 정부가 삼성공화국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윤 전 위원장이 삼성 입장을 대변해왔다고 꼬집는 동시에 황 전 사장이나 지 전 부사장 같은 삼성 출신 인사의 기용이 적절치 않다는 평이었다.
3일 인수위는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를 제한하는 금산분리 규제를 단계적으로 완화하는 방안 검토’를 발표했다. 그동안 재계를 달궈온 ‘삼성은행’ 탄생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는 평이 뒤를 따랐다. 이어서 이 당선인의 최대 공약사항이자 아직 찬반 논란이 가시지 않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 추진을 위해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포함된 5대 건설사의 공동 협의체 구성 발표가 나왔다.
정치권과 재계에선 4월 총선 이후 삼성그룹 순환출자구조를 옥죄어온 금산법과 금융지주사법에 대한 손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물론 한나라당이 안정 의석을 확보했을 경우에 해당될 것이라는 단서가 따라다니지만 다른 정파들이 상대적으로 위축돼 있는 점이 삼성에겐 호재(?)일 수도 있다.
곧 본격화될 삼성 특검의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삼성 입장에선 친 기업 성향의 이 당선인 진영과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 절실할 것이란 지적이다. 최근 불거진 삼성에버랜드 편법증여 의혹 사건 재판과정에서의 삼성 측 증언조작 논란은 이미 항소심 집행유예 판결까지 나온 에버랜드 사건을 다시 헤집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삼성이 2005년 사망한 박 아무개 당시 구조조정본부 상무에게 증언 조작 등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논란이 특검 수사과정에서 사실로 드러날 경우 심각한 도덕적 상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삼성 상황을 주시하는 정·관·재계 인사들은 기업 친화적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삼성이 위기 타개를 위해 경제 논리를 통한 여론 압박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지난 2005년 ‘삼성공화국 논란’ 당시 재계에 떠돌던 ‘삼성전자 본사 미국 이전설’의 두 번째 버전이 눈에 띈다. 3년 전 나돌던 이전설은 글로벌 기업이 국내를 떠나는 것을 방치하지 말라는 정부와 여론에 대한 일종의 압박카드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최근 다시 나도는 삼성전자 이전설은 2005년보다 더 구체적이다. 삼성전자 주식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해외투자자들이 반 삼성 정서가 팽배한 국내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겨 삼성 지명도가 높고 규제가 덜한 미국으로의 이전을 원한다는 내용이다. 2005년 당시엔 이전 ‘검토설’에 무게가 실렸지만 지금은 삼성이 이전 이후의 상황까지 연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 같은 소문은 재계는 물론 검찰 국세청 금감원 공정위 등 삼성을 주시해온 관계당국 안팎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두고 삼성전자 이전이 실제로 이뤄질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시각과 함께 ‘삼성이 수세에서 벗어나 경제 논리를 볼모로 여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업무상 삼성을 자주 접하는 관가 인사들에게 삼성전자 이전설을 흘렸다는 시각을 통해 볼 때 이명박 정부의 경제발전 청사진에 반드시 삼성 이름이 적혀있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조성하려는 의도로 풀이되기도 한다.
지난 2005년 상반기 성균관대에서 열린 삼성전자 CEO들의 릴레이 강연에서 ‘삼성전자 같은 기업 30~40개만 있으면 국민 누구도 세금 낼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삼성전자가 해마다 3조 원가량의 세금을 내는데 이는 국가 세수의 2~3%에 해당한다는 것에 입각한 내용이다. 당시는 삼성공화국 파문이 한창일 때라 삼성에 대한 우호적 여론조성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해 9월 이건희 회장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가 이듬해인 2006년 초 휠체어를 탄 채로 귀국해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삼성공화국 논란보다 더 큰 파장을 몰고 온 삼성 비자금 파문을 돌파하기 위한 삼성의 여론 조성 노력이 얼마나 빛을 볼지 관심이 쏠린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