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 | ||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이 지난 11일 사의를 표명했다. 현대상선은 “노 사장이 회사가 경영 등 모든 면에서 안정된 만큼 이제 그만 쉬고 싶다면서 현 회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그룹 측은 이에 관해 “현대상선 경영이 안정된 점을 감안해 순수한 의도에서 용퇴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스스로가 밝힌 퇴임이유는 이렇다. 노 사장은 지난 1월 11일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제 30년 현대인의 생활을 뒤로하고 제2의 인생을 위해 지난 인생을 돌아보고 재충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여러분과 함께 한 5년여의 시간을 뒤로하고 사장직에서 물러나고자 한다”고 썼다.
노 사장의 빈자리는 김성만 전 한국유리공업 부회장이 채우게 됐다. 김 신임 시장은 60대의 나이답게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전자 전문가다.
현대상선은 “국내는 물론 글로벌 기업에서도 30년여간 근무한 김 사장은 풍부한 경륜과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겸비한 전문 경영인”이라며 “한국유리를 이끌 때 무차입 경영을 실현하는 등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점이 결정적인 발탁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현 회장이 현대 측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적도 없는 데다 해운 전문가가 아닌 전략가를 선택한 것은 전략형 참모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으로 풀이된다. 앞으로 현대상선을 중심으로 한 그룹 재정비 작업을 본격화하려는 포석이 깔려있는 해석이다.
재계 관계자는 “해운업무는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만큼 CEO가 꼭 해운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며 “현대상선이 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하면 현대그룹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역량이 있는 CEO가 필요한 상황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재계에서는 김 신임 사장의 행보보다는 노정익 사장의 갑작스런 퇴임이유를 더 궁금해 하고 있다. 노 사장 본인이 “이제 내 맘대로 색소폰도 불면서 쉬고 싶다”며 자진사퇴를 강조했지만 공식 임기 만료시기인 2009년 3월을 1년 넘게 남겨 둔 상황인 데다 갑작스럽게 퇴진하는 것은 아무래도 의아스럽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그의 퇴임을 두고 분분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취임 5년째를 맞는 현정은 회장이 친정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가신그룹들을 정리하는 작업의 연장선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얼마 전부터 현대상선 주변에서는 네 명의 사내 이사 중 한 명인 현 회장이 현대상선의 경영 전면에 나설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상황. 때마침 현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적극적으로 사업 기반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노 사장 퇴임으로 현 회장 취임 이후 고 정몽헌 회장 때부터 현대그룹을 이끌어 오던 주요 사장단이 모두 그룹을 떠나게 됐다는 점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더하고 있다.
▲ 현정은(왼쪽), 이명박 | ||
당시 재계에서는 그의 퇴임을 두고도 “말은 자진사퇴지만 사실상 용퇴”라고 평가했었다. 그 역시 임기를 1년여 앞두고 조기 퇴진한 데다 현 회장과의 ‘코드 불일치설’이 심심찮게 나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정은 회장이 2006년 말 김중웅 현대경제연구원 회장을 현대증권 회장에 앉힌 데 이어 지난해에는 공동 대표체제까지 도입함으로써 김 사장은 역할이 대폭 축소된 상황이었다. 당시 현대그룹 안팎에서는 “현정은 회장이 ‘정몽헌계’ 임원들을 정리하고 있다. 노정익 사장도 곧 물러날 것”이라는 말들이 돌았다.
이 말대로 김 사장 뒤를 이어 퇴진한 노정익 사장은 현대그룹의 영욕을 지켜봐온 대표적인 현대맨이었다. 지난 1977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능력을 인정받아 그룹 종합기획실에서 경력을 쌓았고 현대캐피탈 대표를 거쳤다. 지난 2001년부터는 한동안 현대그룹을 떠나 있었지만 2002년 9월 유동성 위기에 처했던 현대상선 사장으로 현대그룹에 복귀했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현대상선은 유동성 위기로 살얼음을 걷고 있었다. 조 단위가 넘는 단기 차입금에다 대북사업과 관련해 각종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룹의 존폐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동차 운송 부문을 매각하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냈고 현대상선을 단기차입금이 전혀 없는 건실한 회사로 탈바꿈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노 사장은 그런 와중에 발생한 KCC와의 경영권 분쟁을 맞아서도 동요하는 그룹 안팎을 다잡으며 승리를 이끌어낸 주역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적군’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 측에서 ‘뛰어난 재무통’이라며 러브콜을 보냈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였다. 이런 그의 퇴진을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건설 M&A 등 그룹의 명운이 걸린 현안을 앞두고 물러났다는 점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며 “현정은 회장과 무언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갈등설의 배경에는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도 있다. 노정익 사장은 지난 2003년 스톡옵션 20만 주(행사가 3175원)를 부여받았다. 노 사장이 스톡옵션 전량을 행사하면 15일 종가(3만 5900원) 기준으로 65억 4500만 원의 평가차익을 얻는다. 그러나 자발적 퇴임이라면 이 스톡옵션이 취소될 수 있다.
이에 노 사장은 회사 측에 ‘스톡옵션을 행사하겠다’는 취지의 내용증명을 보내 접수를 확인 뒤 사표를 쓴 것으로 알려진다. 이 상황을 정리하자면 노 사장은 ‘원하지 않는 퇴임’을 했다는 것으로 보여 갈등설에 힘을 실어준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내용증명에 대해선 알지 못하지만 노 사장의 스톡옵션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어쨌거나 노 사장의 퇴임으로 현 회장 입장에서는 인사 부담을 덜게 됐다. 친정 체제 구축에 필요한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재계는 현 회장이 전폭적인 신임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기승 그룹 기획총괄본부장 겸 현대U&I 사장과 장녀인 정지이 전무가 경영 전면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노 사장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노 사장은 1977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이명박 당선자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지난 92년까지 15년 가까이 그와 한솥밥을 먹었다. 또 현대상선 사장으로 옮겨와 5년 동안 최고경영자로 일하면서는 위기관리 등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실무’를 중시하는 이명박 당선인이 좋아할 만한 자격을 모두 갖춘 인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꼬박 30년을 몸담았던 ‘현대’의 둥지를 떠난 김 사장이 스톡옵션 등 현대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지, 또 새로 출범할 정부의 요직 인사나 정치인으로 변신할지, 아니면 ‘제3의 길’을 찾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영복 언론인·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