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일요신문>의 취재 결과 필리핀에는 단순히 돈을 노린 범죄조직 뿐만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전문 킬러 조직이 존재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도망 간 경제사범들만을 대상으로 한 조직이다. 이름하야 ‘도망자 처리반’. 필리핀 현지에서 활동 중인 ‘도망자 처리반’ 관계자를 만나 신종조직의 실체를 파헤쳐봤다.
최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경제사범 132명(12%)이 필리핀으로 도피했다.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다. 한 경찰청 관계자는 “기존의 도피사범 절반이 미국, 중국을 택했지만 최근엔 필리핀이 새로운 도피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도피사범들에게 각광(?)받는 현실과는 달리 현지 관계자들에 따르면 필리핀은 ‘한국인 도피자들의 무덤’으로 일컬어지고 있다고 한다. 일례로 한국인 도피사범을 처리하는 신종 조직이 발 빠르게 조성되고 있다는 것.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단 돈 500만 원이면 한국인 도피자 1명 목숨 처리 가능하다!”
필리핀으로 도피한 경제사범들이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1년 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는 일이 허다한 이유가 ‘도망자 처리반’ 때문이라고 한다.
도망자처리반이 운영되는 시스템은 아주 간단하다. 필리핀 현지에서 거주 중인 ‘한인조직원’, ‘한국인 중간책’, ‘필리핀인 킬러’, 이렇게 3중 구조로 이뤄졌다.
한국인 중간책이 의뢰 건을 접수하는 즉시 한인조직원에게 청부살해 대상자의 개인 정보를 보낸다. 이 과정에서 의뢰인은 사례금으로 최소 500만 원을 내놓아야 한다. 사례금과 살해 대상자의 개인정보는 한인조직원에 의해 필리핀인 킬러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2~3일 안에 ‘일’은 끝난다. 한 명의 희생자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한국인 중간책과 한인조직원들이 도망자처리반의 핵심인데도 불구하고 기존의 청부조직 브로커처럼 커미션(수수료)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도망자 처리반’에서 중간책으로 활동하고 있는 2명을 직접 만났다. 이들 중간책에 따르면 필리핀 현지에서 활동 중인 한인조직원들은 한국 중간책을 ‘형님’으로 모시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원래는 한국에서 ‘OO파’에 소속된 ‘한 식구’였다가 이른바 ‘사고’를 치거나 기타 범죄 혐의로 필리핀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낸 이들이 바로 한인조직원들이기 때문.
이에 대해 중간책 A 씨는 “쉽게 말해 사고 쳐서 필리핀으로 유학 간 딸이 한국 친정에 잘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중간에서 솜씨 좋은 필리핀 킬러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주면 고국에 계신 형님들이 고맙다고 해주니까. 그냥 다 의리인 거다. 더 이상의 이유는 묻지 마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중간책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A 씨는 “우리는 딱 500만 원만 받는다. 처리반 자체가 ‘라인(인맥)’으로 움직이는 신뢰조직이라서 500만 원 이상을 더 준다고 해도 신원불명의 의뢰인은 받지 않는다”면서 “대신 할인은 안 된다. 초보 킬러는 쓰지 않고 입이 무겁고 솜씨 좋은 현지인을 기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지 킬러 중에는 경찰도 있다고 말했다. 이 역시 사실일까. 중간책 A 씨는 “필리핀은 무법천지다. 현지 경찰이 부업으로 청부살인하는 사례가 꽤 많다”고 말했다. 청부살인은 90%이상 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군인, 경찰 등이 가담하는 건 자연스러운 상황이라는 게 그의 전언이다.
그러면서 A 씨는 현지 필리핀 경찰의 법치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를 소개했다. 그는 “경찰차가 도로를 역주행 하다가 정 방향으로 오는 차를 치고 그냥 가버리는 일은 예사다.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죄수가 교도관이나 경찰에게 용돈을 쥐어주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외출해 음주, 성매매 등을 즐기고 올 수도 있다”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을 전했다.
그렇다면 현지 경찰까지 가담한 문제의 ‘도망자 처리반’이 처리(?)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알아보니 대부분 횡령 혐의로 도피해온 중소기업 사업가라고 한다. 이런 중간책들에 의해 청부살해 당한 도피범들이 지난 5년간 30여 명이 넘는다는 게 A 씨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중간책 B 씨는 “필리핀에 대한 ‘정보’가 없는 사업가들이 안타깝다. 그래서 종종 ‘바지사장’들이 변을 당하는 게 아니냐”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횡령 혐의로 경찰조사를 피해 필리핀으로 도주한 한국 바지사장(직책만 대표이고, 실제 대표는 따로 있는 경우)들의 최후는 대부분 실종이라는 게 B 씨의 주장이다. B 씨는 “필리핀에서 실종됐다는 말은 그냥 죽은 거라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도망갈 거면 미국이나 태국으로 가야지. 필리핀으로 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주변인들의 꾀에 넘어가서 오는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B 씨는 9년 전 한 중소업체에서 벌어진 일을 소개했다. 이 업체의 ‘바지사장’이었던 ㄱ 씨는 명의를 빌려주는 대신 대가성 돈으로 약 3억~4억 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장 명의를 단지 2년이 채 안됐을 무렵 일이 터졌다. 거액의 횡령 혐의로 경찰 조사가 들어온다는 통보를 받은 것.
초반에 바지사장을 해줄 것을 부탁했던 일부 관련자들은 ㄱ 씨에게 횡령 건과 관련해서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들은 ‘도피자금을 마련해주겠다. 보상하는 차원에서 횡령 금액의 일부도 추후 입금해주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필리핀에서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골프나 치다 와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ㄱ 씨는 필리핀으로 떠났고 한 달 만에 실종됐다.
B 씨는 “ㄱ 씨처럼 필리핀에서 사라진 바지사장들 20명 정도를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쪽 업계(?)에선 ‘라인’을 따서 죽인다고들 한다. ‘중간책’만 잘 만나면 사람 처리는 식은 죽 먹기지”라고 말했다.
중간책을 잘 고용하면 ㄱ 씨와 같은 바지사장들을 아예 실종시켜 사건 자체를 묻어버릴 수 있단 얘기다.
B 씨는 “이 ‘라인’을 갖고 있는 이들 중에는 중소기업 사장을 비롯해 고위급 인사들도 다소 포함돼 있다”고 귀띔했다. 라인에 대한 정보가 일부 사업가들 사이에서 ‘고급정보’로 통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런 일들이 범죄가 아니냐는 질문에 “중간에서 이어주기(라인)만 하는 거다. 거의 그렇다고 보면 된다. 결혼도 중매 서주는데 현지인 킬러를 중매 서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반박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