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에 들어서는 최태원 회장. 최 회장의 법정구속 이후 SK그룹의 ‘계열사 독립경영’ 구호의 진정성이 의심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1일 법정구속되기 직전까지도 최태원 회장은 횡령 사건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최 회장은 종종 그룹 내에서 자신의 위치와 권한이 그다지 막강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왔다. SK그룹은 조직을 개편, 최고의사결정을 오너 총수가 아닌 수펙스추구협의회를 통해 하고 계열사의 독립경영을 강화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재판용’이라는 비판에 SK그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심 판결문과 지난 7일 단행한 임원인사를 뜯어보면 진정성에 의심이 갈 만하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그룹의 임직원은 물론 심지어 친동생이자 그룹의 2인자 자리인 수석부회장에 올라 있는 최재원 부회장마저 “(최태원 회장이 비록) 친형이지만 기본적으로 상하관계다”라고 진술했을 정도로 최태원 회장의 권한은 막강했다. “동생으로서 예우는 받았지만 권한은 전혀 없었다. 2009년 SK(주)로 옮길 때까지 SK(주)로부터 보고를 받은 적도 없었다”는 최 부회장의 진술, “최재원 부회장은 당시 보고라인에 있지는 않았다”는 SK 재무팀 박 아무개 부장의 진술 등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진술은 최태원 회장의 법정구속과 최재원 부회장의 무죄 판결의 근거 중 하나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최태원 회장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SK그룹이 조직을 개편하고 지난 7일 주요 계열사 사장단 인사를 실시했지만 일부에서는 이마저도 최태원 회장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비판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문덕규 SK네트웍스 사장 선임이다.
지난 2003년 10월 SK글로벌에서 상호를 변경한 SK네트웍스는 SK그룹의 핵심 계열사 중 하나다. 문 사장은 2003년 SK글로벌 재무지원실장으로서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비록 2008년 8월 15일 최태원 회장과 함께 특별사면됐으나 SK그룹 사상 최악의 사건 연루자를 핵심 계열사 사장으로 선임한 것은 최태원 회장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해석이 적지 않다.
이번 인사에 대해 SK그룹 측은 “그동안 회장의 의중을 반영해 단행되던 국내 대기업의 인사 관행에서 탈피해 관계사별 이사회 및 CEO(최고경영자)의 책임 하에 결정하고 시행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경제개혁연대는 “분식회계 사건에 연루됐던 김창근 의장과 문덕규 사장 선임은 최태원 회장의 친정체제 구축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원은 “이 같은 인사는 최태원 회장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라며 “SK그룹의 신경영체제에 대한 진정성이 의심될 뿐 아니라 그것이 실은 최 회장의 재판을 고려한 형식적이었던 것임이 판명됐다”고 말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최태원 회장의 구체적인 양형 사유와 관련해 “기업 사유화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표출하였다”며 “공동피고인들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전가하는 변명으로 일관”한 점을 꼬집었다. 판결문을 통해 본 최태원 회장과 SK그룹은 우리나라 재벌과 오너의 부정적인 면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재계 관계자는 “다른 재벌은 오죽하겠느냐”며 혀를 찼다.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화가 진행됐지만 기업만 그렇지 못하다’는 지적에 아니라고 항변해왔던 여타 재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