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두산그룹 인사와 지분 변동과정에서 총수일가 4세들이 대거 약진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3세 막내 격으로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 박용만 회장과 4세 장손인 박정원 부회장이 향후 어떤 관계를 빚어낼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
두산은 그룹 회장직을 없애고 총수일가 3세 형제들이 주요 계열사 회장직을 나눠가지면서 ‘형제의 난’으로 얼룩졌던 형제경영의 본래 취지를 되살려가고 있다. 두산가 장자인 박용곤 명예회장을 필두로 3남 박용성 회장이 두산중공업을, 4남 박용현 회장이 두산건설을, 그리고 5남 박용만 회장이 두산인프라코어를 각각 이끌고 있다.
특히 박용만 회장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박용만 회장은 ‘형제의 난’ 당시 박용오 전 회장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박용성 회장을 적극 보필해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룹 회장직이 없어진 상태에서 실질적인 총수 역할은 박용성 회장의 몫이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실질적인 경영은 상당 부분 박용만 회장 어깨에 놓이게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두산그룹 안팎에선 경영현장을 누비며 결정권을 행사하는 박용만 회장이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라는 평가도 들려온다.
박용만 회장은 지난 1월 1일자로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해 본격적인 박용만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형제의 난 이후 두산그룹의 얼굴 역할을 해온 박용성 회장의 남다른 신뢰 역시 박용만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박용곤 명예회장과 형제의 난으로 이미지를 구긴 박용성 회장 다음으로 박용현 회장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의사 출신. 형제의 난 수습 과정에서 총수일가 일원으로 회장단 명부에 이름을 올린 그가 그룹 살림을 전면에서 책임질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자연스레 박용만 회장에게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박용만 회장은 형제의 난 당시 총수일가 회장단이 모두 물러나 있던 때에도 두산 사옥 내 별도 사무실에 종종 나타나 업무를 처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비난 여론 때문에 드러내놓고 활동은 못했지만 그만큼 두산그룹 경영에서 박용만 회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박용만 회장의 약진과 더불어 두산 내에선 총수일가 4세들의 전진배치가 가속화되고 있다. 지난 연말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 두산건설 부회장이 지주회사격인 ㈜두산의 부회장을 겸임하고 박 명예회장 차남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사장이 사장을 맡는 인사가 단행됐다.
특히 두산 총수일가 장손인 박정원 부회장의 ㈜두산 부회장 겸임이 갖는 상징성이 커 보인다. 박용만 회장이 뛰어난 경영능력을 보이고 있지만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꼬리표가 내내 따라다녔다. 국내 재벌가 정서상 적통 장자 승계 원칙이 우선시 되는 점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4세들의 약진이 다가올 ‘박정원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포석이란 해석도 있다. 이렇다 보니 두산그룹 내 삼촌-조카 간 라이벌 구도 형성을 그려볼 수 있다는 이야기마저 들려온다.
지난 1년간 ㈜두산 대주주들의 지분율 변화 역시 두산 총수일가 내에서 박용만 회장과 박정원 부회장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퇴출당한 박용오 전 회장의 ㈜두산 지분은 1년 전 1.63%에 비해 1.21%포인트 감소한 0.42%에 불과해 조만간 ㈜두산 지배구조에서 이름을 내릴지 모른다는 전망을 낳기도 한다. 박용곤-박용성-박용현-박용만 3세 형제의 ㈜두산 지분율은 1년 전과 변동이 없다. 박용성 회장의 지분율이 0.04%p 줄어들었을 뿐이다.
박용만 회장의 ㈜두산 지분율은 현재 3.40%인데 이는 조카인 박정원 부회장의 4.24%에 뒤지는 수치다. 지난해 1월 박정원 부회장 ㈜두산 지분율은 1.46%였다. 1년 사이 박용만 부회장의 지분이 늘지 않는 동안 박정원 부회장의 지분율이 2.78%p 증가해 ㈜두산 대주주 순위를 뒤바꿔 놓은 것이다.
정기인사에서 약진한 두산 총수일가 4세들 역시 지난 한 해 동안 ㈜두산 지분율을 크게 늘렸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 박정원 부회장의 지분율이 늘어나는 사이 차남 박지원 사장과 장녀 박혜원 오리콤 매거진부문 상무의 지분율도 1%p가량 늘었다. 박용성 회장 아들들인 박진원-박석원 형제와, 박용현 회장 아들들인 박태원-박형원-박인원 형제가 모두 1년 전에 비해 ㈜두산 지분율 1~2%p대를 늘려 그룹 대주주로서의 위상을 강화했다. 박용만 부회장의 자제들도 1%p가량의 지분을 늘렸으나 박용성-박용현 형제 자제들 지분율엔 못 미친다.
지난해 두산 총수일가의 지분율 증가는 지주회사 전환 작업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지주회사 지분 확보는 총수일가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박정원 부회장의 ㈜두산 지분율 증가는 향후 그 위상을 가늠케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일각에선 경영 보폭을 넓혀온 박용만 회장과 지분율에서 이미 박용만 부회장을 추월해버린 박정원 부회장이 그룹의 간판 자리를 놓고 물밑 경쟁을 벌일 가능성도 거론한다. 박용만 부회장 뒤엔 형제의 난에서 끈끈한 형제애를 과시했던 박용성 회장이 있으며 박정원 부회장에겐 그룹의 최고 어른인 아버지 박용곤 명예회장이 있다. 형제의 난 이후 ‘또 다른 난’이 두산그룹 내에서 잉태될지 모른다는 호사가들 상상의 나래는 점점 커져 가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