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삼성전자의 주주총회 모습. 비자금 의혹과 태안 사태 등으로 악재를 맞은 삼성은 올해 주총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 ||
주총을 앞두고 이번 시즌 최고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삼성그룹이다. 특검수사로 인해 공황상태나 다름없는 삼성그룹은 매년 2월 28일에 열렸던 계열사들의 주총을 한 달 미뤄 오는 3월 28일 일제히 개최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중공업과 제일모직 등이 이날 주총을 열기로 확정한 회사들이다. 이번 주총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 핵심 고위 임원들과 임기가 끝나는 등기이사들의 거취다. 올해 임기가 끝나는 주요 인사들은 삼성전자 등기이사인 김인주 사장(그룹 전략기획실 차장)을 비롯해 강호문 삼성전기 사장, 박양규 삼성네트웍스 사장, 이중구 삼성테크윈 사장, 지성하 삼성물산 사장 등이다. 임원 선임은 주총 2주 전까지 주주들에게 통보해야 하기 때문에 늦어도 3월 중순에는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하지만 인사 규모는 최소한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삼성 관계자는 “현재로선 분위기상 대부분의 등기이사들이 재선임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마당에 물갈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신 비자금 의혹에 연루된 계열사들은 올해 주총에서 소액주주들의 호된 질책을 피하기 힘들 전망이다.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우리금융지주 삼성증권 삼성화재해상보험 등 3사의 주총에 참석해 ‘주총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우리은행의 금융실명법 위반 여부, 삼성증권의 차명계좌 개설·관리 및 증권거래법 위반 여부, 삼성화재의 보험금 비자금 유용 혐의 등을 직접 추궁하겠다”고 공언했다.
특히 차명계좌라는 현안을 안고 있는 삼성증권 주주총회에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전망이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해 그룹 전·현직 임원에게 차명계좌를 개설해준 배경과 증권거래법 위반 문제를 따져 묻고 경영진의 해임과 책임자 문책을 요구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또 삼성증권이 삼성SDS지분 매각과정에서 수행한 역할과 관련, 해당거래가 이루어진 경위와 최대주주의 사익 추구를 위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사실이 없는지 등에 대해서도 추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중공업도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을 둘러싼 공방이 예고돼 있다.
올해 주총의 경우 삼성을 제외할 때 다른 대기업들의 경우는 대체로 ‘빅 이슈’가 없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막상 주총장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함부로 예단하기 어렵다. 경제개혁연대도 삼성 이외에 신세계 현대자동차 ㈜한화 삼성카드 등이 총수 일가의 편법 상속과 계열사 부당 지원에 나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관련 경영진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회사 매각이 본격화될 하이닉스는 그동안 잠잠했던 소액주주들의 발언이 주총장에서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해 4분기엔 4년 만에 3000억 원이 넘는 영업적자를 기록함에 따라 경영진에 대한 소액주주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현대그룹 핵심 계열사 현대상선은 김성만 사장을 오는 3월 주총에서 대표이사로 선임할 계획이다. 김 사장의 선임은 큰 무리가 없을 전망이지만 현대상선 주총은 ‘정관변경’이라는 지뢰가 잠복해 있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주총 당시 이사회 결의로 제3자에게 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정관변경을 시도했지만 대주주인 현대중공업과 KCC, 소액주주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이는 그룹 경영권과 현대건설 M&A와도 무관치 않아 이번 주총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 장하성. | ||
필립스의 지분 매각으로 LG그룹의 단독경영체제로 전환하는 LG필립스LCD에서는 필립스와의 신경전이 예고돼 있다. LG필립스LCD는 회사 이름도 LG디스플레이로 바꾸기로 했다. 이밖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맹비난하면서 경제계에 이슈로 재등장한 ‘스톡옵션제’도 이번 주주총회에서 도마 위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주요 기업들은 스톡옵션제도 유지를 주장하겠지만 기업의 주가 상승이 내부적인 혁신이나 임원들의 노력보다는 주식시장의 활황에 편승한 기업들을 중심으로 스톡옵션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주들의 요구가 거세질 전망이다.
주총 하면 떠오르는 ‘약방의 감초’ 장하성 펀드도 이번 시즌에는 활동을 재개한다. 장하성 펀드의 공식명칭은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F)’. 아직 주총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장하성 펀드는 IT업체인 에스에프에이 정기주총에 사외이사 2명, 감사 1명씩을 추천해 놨다. 또 한국전기초자에 대해서도 “대주주인 아사히글라스의 부당한 공개 매수와 상장폐지 시도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경영진과 대주주를 견제·감독할 수 있는 독립적인 감사가 필요하다”며 정기주총 안건으로 감사 1명을 추가로 선임하는 주주제안을 했다.
에스에프에이의 경우 장하성 펀드가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5.20%로 그리 많지 않지만 지난해 동원개발을 상대로 활동할 때 손발을 맞췄던 삼성투신도 7.35%를 갖고 있어 세력이 만만치 않다.
중소기업을 둘러보면 얘기는 더 복잡해진다. 이번 시즌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 표 대결이 예고된 곳이 많다는 점이 주총의 관전 포인트다.
25일 열리는 코스닥 상장사 버추얼텍 주총에서는 경영진과 최대주주가 충돌하는 보기 드문 장면이 벌어질 전망이다. 이 회사는 지난 연말부터 의류업체인 JS코퍼레이션 홍재성 회장이 주식을 매집해 최대주주가 됐는데 홍 회장은 이번 주총에 자신을 포함해 이사후보 1명, 감사후보 1명을 각각 추천해 둔 상태다. 물론 회사 측은 별도의 후보를 내세웠다. 홍 회장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14.62%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에 맞서는 서지현 버추얼텍 대표이사는 12.86%의 의결권을 갖고 있어 박빙의 승부가 예상된다.
소액주주를 상대로 진땀을 흘리는 회사도 나타날 전망이다. 전자파흡수소재 전문업체 AMIC는 소액주주와 경영진 간 경영권 분쟁이 벌어질 조짐이다. AMIC 소액주주연대는 올 정기주총에서 이사 6인과 감사 2인을 선임하겠다는 주주 제안을 AMIC에 통보했다. AMIC는 정관상 이사 10명, 감사 3명을 한도로 두고 있어 주주제안이 주총을 통과할 경우 소액주주들이 이사회를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소액주주연대 측은 “지분율이 0.5% 수준에 회사 대표가 60억 원이 넘는 회사 자금을 자회사에 무분별하게 지원해 주주들에게 손실을 끼쳤다”며 벼르고 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