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설 연휴 첫날인 지난 6일 첫 전파를 탄 현대중공업의 ‘왕회장 TV 광고’는 연휴 내 세인들의 화제가 됐다. 정주영 창업주에 대한 향수는 물론 현대건설 CEO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그리고 광고주인 현대중공업의 실질적 오너이자 집권당 최고위원이라는 ‘날개’를 단 정몽준 의원과 연결돼 정치적 배경까지 억측을 낳은 것이다. 이는 또한 정 의원을 포함해 현대가 ‘장자’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좌장’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라는 ‘3정’을 축으로 한 범 현대가의 심상찮은 움직임과도 맞물렸다. ‘3정’이 그려낼 ‘큰 그림’의 밑그림을 스케치해 봤다.
왕회장 TV 광고와 관련, 재계 일각에서는 이 광고가 이노션에서 제작됐다는 데 주목한다. 이노션은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 그 지분의 20%를, 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40%를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40%를 가지고 있는 딸 정성이 이노션 고문이 만든 회사로 100% 정몽구 회장의 영향력하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공개입찰을 받아 선정될 것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상식적으로 광고 소재인 왕회장의 ‘초상권자’ 영순위는 장남인 정몽구 회장으로 볼 수 있다. 정몽준 의원 소유 회사 광고를, 정주영 창업주를 소재로, 정몽구 회장 소유 광고대행사에서 제작했다는 얘기다. 일반인들이 봤을 땐 지난해 10월 현대중공업이 현대자동차 지분 1.5%를 매입한 것보다 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2002년 ‘왕자의 난’ 이후 5년 만인 지난 연말 계동 사옥의 ‘현대’ 표지석이 제 자리를 찾아 많은 뒷얘기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지난 1월 정몽원 회장의 한라그룹이 그룹의 모태인 만도를 되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KCC의 지분참여와 현대차그룹 등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최근 신흥증권을 인수했다. 인수 배경에 대해 회사 측은 “금융시장 진출 교두보 구축과 유동성 확보 및 수익성 제고 등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여기에 현대그룹의 현대증권에 맞서는 범 현대가의 M&A 창구 역할론을 제기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현대증권의 M&A 전문가 영입 작업을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11일 현대중공업그룹의 비상장 계열사인 현대삼호중공업이 상장을 위한 형식적 요건을 갖췄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에 대해 지주회사 전환용과 올해 진행될 대형 M&A를 위한 실탄 비축용이라는 관측이 뒤따랐다. 13일엔 KCC와 현대중공업의 합작 소식이 들려왔다. 두 기업이 총 6000억 원을 투자, 충남 대죽산업단지에 연 생산량 6000톤 규모의 폴리실리콘(태양전지 원료) 생산 공장을 짓기로 했다는 것이다.
‘3정(정상영 정몽구 정몽준)’과 관련한 일련의 일들은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범 현대가 내에서 뭔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는 또한 가까운 시일 안에 뭔가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이어지면서 재계 관계자들의 눈은 현대건설 인수전에 모아졌다.
현대건설은 기업 자체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건설업체다. 게다가 ‘현대제국’의 모태요, TV광고로 되살아난 정주영 창업주의 숨결이 살아있는 기업이다. 현대 총수 일가라면 현대건설을 되찾아오는 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먼저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측은 김성만 신임 현대상선 사장이 취임과 동시에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확고히 했다. 범 현대가 쪽에선 자금여력 등 여러 상황으로 볼 때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주 공격수’로 나설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현대중공업 측에선 “매각 일정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현대중공업은 지난 1월 대한통운 인수전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이후 일각에선 ‘M&A 예행연습이다. 현대중공업이 노리는 먹잇감은 현대오일뱅크와 현대건설뿐’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 현대증권이 “현대중공업 입장에서 현대건설 M&A에 대한 집중화 전략이 가능해졌다”고 보고서를 내는 등 재계에선 현대중공업의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현재로선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현대중공업 쪽이 우위에 있다는 평가다. 정몽준 의원은 대선 막판 이명박 당선인 지지를 선언하고 집권당 최고위원직에 올랐다. 대형 M&A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치력’을 크게 강화한 셈이다. 자금도 넉넉하다. 현재 현대중공업의 동원 가능한 현금은 10조 원대로 알려진다. 반면 현대그룹 측 김성만 현대상선 사장은 “재무적 투자자 등 금융을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증권가의 한 관계자는 “김 사장의 말은 그만큼 실탄이 부족하다는 반증”이라고 꼬집었다. 현재 현대그룹이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은 2조 원대로 알려진다.
재계 관계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 현대건설은 현대그룹 경영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대건설이 가진 현대상선 지분 8.3%가 현대엘리베이터를 제외한 현대그룹 전체 경영권 향방의 결정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현대상선의 지분구조는 현대그룹 우호지분 약 46.7% 대 현대중공업 우호지분 약 33.5%로 맞서 있다. 현대건설이 현대중공업에 넘어가고 범 현대가 지분이 현대중공업으로 뭉친다면 약 46.7 대 42.8로 바뀐다.
그래도 현대그룹이 앞선다. 현대그룹 측이 “현대건설을 놓치더라도 기업의 총력을 집중하면 적대적 M&A는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밝히는 이유다. 문제는 현대그룹 측 주요 지분 구성이 직접 보유지분이 아니라 케이프포춘(7.06%) 넥스젠캐피탈(3.53%) 은행권의 상환우선주(6.69%) 등 ‘우호지분’이라는 데 있다. 의결권·우선매수권 계약이 돼 있어 ‘확실한 우호지분’이라고는 하지만 계약이 끝나는 시점(2011년)에 가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현정은 회장으로선 지금보다 더 심각한 경영권 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현대그룹 측은 범 현대가의 결집을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미래를 그리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범 현대가’라고는 하지만 각각의 생각이 다를 것”이라며 “일치단결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평했다. 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일례로 정몽구 회장 스타일로 볼 때 ‘장자’인 자신을 제치고 정상영 명예회장이 ‘좌장’으로 부각되는 것도, 동생 정몽준 의원이 ‘적통’처럼 나서는 것도 불쾌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전의 양면이다. 명분과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단결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반론이 나오는 것.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현대중공업의 현대그룹 인수 이후’에 대한 시나리오가 나돈다. ‘현대상선과 현대건설 플랜트·전기사업 부문은 현대중공업이 갖고, 토목·건축사업 부문은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에, 증권업에 뛰어든 정몽구 회장에게는 현대증권을 떼어 준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렇다면 ‘현대제국의 부활’이라는 명분과 함께 범 현대가 각 그룹의 실리도 적지 않다는 근거 없는 억측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최근 나도는 범 현대가 결집설은 물론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 지주회사 전환 가능성 등에 대해 “소설 좀 쓰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현대건설 인수전이 끝날 때까지, 또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한 ‘소설’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