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장님 에쿠스랑 접촉사고 났는데 좀 내려오셔야 할 것 같아요” 징수과 직원이 에쿠스 앞유리에 붙어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기소된 노부부 집 앞에서 잠복을 할 때였다. 전화를 받지 않고 문도 열어주지 않자 집 앞에 주차돼 있던 에쿠스를 보고 꾀를 낸 것이다. 에쿠스에 붙어있던 전화번호는 지금까지 연락을 시도했던 전화번호와 달랐다.
접촉사고 소식을 들은 홍 아무개 씨(77)가 헐레벌떡 내려왔다. “접촉사고 안 났습니다. 세금 내셔야죠” 징수과 직원이 홍 씨 집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노부부는 2005년부터 세금을 피해 다녔다. 100억 원대 부동산을 처분하고, 200억 원에 가까운 재산을 부인 명의로 돌리며 합의 이혼을 했다. 하지만 이 부부는 강남의 고급 빌라에서 함께 살고 동거 사실을 숨기기 위해 7번의 위장전입을 했다. 이들이 체납한 세금만 41억 원. 징수과 안승만 주임은 “집에 들어가서 세금을 내겠다고 합의를 했지만 이후에도 끝까지 세금을 내지 않았다”며 “정말 악질이다 싶어 결국 검찰에 고발을 했다. 세금 징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홍 씨 부부처럼 위장 이혼을 하는 경우는 고액 세금 체납자들에게는 비일비재한 일이라고 한다. 징수과 권해윤 과장은 “배우자에게 재산을 빼돌리고 위장 이혼을 하거나 가족들 명의로 재산을 이전하는 것은 세금을 회피하는 가장 쉬운 수법이다. 위장 이혼이라고 입증해내기가 어렵고 세금을 징수하려면 소송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국세청이 밝힌 고액 세금 체납 사례에도 체납자는 파산 신청을 하고 배우자 명의로 된 고급 아파트에서 몰래 살거나, 고급 승용차를 배우자 명의로 돌려놓는 경우가 빈번했다.
병자처럼 보이는 부인을 차마 조사할 수 없었던 안 주임은 그대로 돌아갔지만, 그 다음날 실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익명으로 한 통의 제보전화가 왔던 것. 제보자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얼핏 들었는데 누가 징수과 피하려고 부인은 병자처럼 꾸미고 자신은 세탁기에 숨었다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안 주임이 또다시 부인의 집을 찾아가 세탁기를 뒤져보니 A 씨가 보이지 않았다. 따지려드는 부인을 뒤로 하고 집 안 곳곳을 뒤지자 이번엔 베란다 옷장에 반바지 차림으로 숨어있는 A 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금 징수를 하는 공무원들을 협박하거나 폭행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한다. 국세청 ‘숨긴 재산 무한 추적팀’에서는 한 격분한 체납자가 사무실로 찾아와 직원을 협박하기도 했다. 세금체납액이 증가해 체납자의 부동산을 압류하자 벌어진 일이었다. 체납자는 자신이 지명수배자라고 큰 소리를 치며 흉기를 꺼내 직원에게 “딸 있어요? 아들 있어요?”라며 위협했다.
권 과장은 “징수과 직원들이 체납자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밤길 조심해라’라고 듣는 경우가 빈번하다”라고 밝혔다. 안 주임 또한 “하루는 체납자의 동생이 사무실로 찾아와 큰 식칼을 꺼내놓으며 위협을 하기도 했다. 그 사건 이후로 사무실에 CCTV를 설치했다”고 전했다.
현재 징수과는 고액 세금 체납자를 적발하기 위해 인력을 확충하고 첨단기술 장비 동원, 맨투맨 책임 징수 등을 도입한 상태다. 권 과장은 “이번 노부부 사건 이후 고액상습체납자에 대한 고소 고발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현재도 조사 중인 체납자들이 많다”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잠깐! - 명단 공개해도 ‘모르쇠’ 국세청은 2012년 11월 29일 국세청 홈페이지를 통해 5억 원 이상의 고액, 상습체납자 7213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들이 체납한 금액만도 11조 777억 원에 달했다. 서울시 또한 2012년 12월 10일 3000만 원 이상 고액, 상습체납자 5085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들이 체납한 지방세는 총 7978억 원이다. 하지만 명단 공개 이후에도 세금 납부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게 국세청과 서울시의 설명이다. 정 과장은 “명단 공개는 경각심 차원이 크다. 실질적으로 세금 납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고액상습체납자가 체납하는 세금 중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은 ‘종합소득세’다. 국세청이 공개한 상위 10위 체납자 중 5명이 종합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그밖에 증여세, 법인세, 상속세 등도 단골 체납 세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