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회장이 말을 바꾼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6년에 대우건설을 인수할 당시에도 “대우빌딩은 팔지 않겠다”라고 공언했지만 불과 5개월도 지나지 않아 매각을 발표했던 것. 이 때문에 금호아시아나는 “당초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데 무리한 것 아니냐” “대우건설 돈으로 대우건설을 인수했다”라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인수전을 진두지휘했던 박 회장도 “대기업 총수가 말을 너무 쉽게 뒤집는 것 아니냐”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지난 1월 대한통운을 인수하며 ‘M&A의 미다스 손’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던 박 회장. 인수는 끝나고 최종계약만 남은 상황에서 그의 도덕성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최근 금호아시아나는 대한통운 인수전에서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했던 농협을 주간금융사에서 배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협의 한 관계자는 “돈이 급할 땐 아쉬운 소리하더니 이젠 필요 없다는 것이냐. 이런 식으로 하다간 신뢰가 무너질 것”이라고 금호아시아나를 비난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아직까지는 박 회장 이름이 직접적으로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엔 박 회장의 말 바꾸기가 시비에 오를 공산이 커 보인다. 금호아시아나가 참가한 M&A엔 언제나 박 회장이 앞장섰기 때문. 이에 대해 금호아시아나 측에서는 “아직 논의 중인 사항이라 말해줄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박 회장의 말 바꾸기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바로 저가항공 사업 진출이다. 지난해 재계 라이벌 대한항공이 저가항공 사업에 뛰어들자 박 회장은 “대한항공이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저가항공 사업에 뛰어들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회사 측에서는 보도자료까지 배포하며 “저가항공 사업을 보다 엄격히 심사해야 한다”라고 건설교통부에 주문하기도 했다. 결국 대한항공은 금호아시아나의 뜻대로(?) 국제선 취항은 허가받지 못한 채 반쪽짜리 저가항공 사업만 하게 됐다.
건설교통부의 이러한 결정에 가장 큰 이득을 본 곳은 대한항공에 비해 단거리 국제선 비중이 월등히 높은 아시아나항공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아시아나의 행보를 ‘경쟁사 발목잡기’로 보는 이들이 많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한항공이 한다고 할 땐 반대부터 하더니 결국엔 자기들도 뛰어든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재계 서열이 올라갈수록 그에 걸맞은 상도의도 갖춰야 할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금호아시아나에서는 “시장의 트렌드를 따라가다 보니 입장이 바뀌었다”라고 해명하고 있다.
박 회장도 이번엔 많이 고심했을 것 같다. 계속된 말 바꾸기로 인해 재계의 시선이 그리 곱지 못 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 그렇다면 박 회장은 왜 ‘욕먹을 각오’까지 하며 저가항공 사업에 뛰어들었을까. 일단 회사 측의 말대로 불가피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항공시장이 프리미엄과 저가로 양분되며 저가항공도 무시 못 할 규모로 성장한 것. 특히 25일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이 규제완화를 강조하고 있어 저가항공 진입에 대한 장벽이 완화될 가능성이 큰 것도 금호아시아나가 저가항공 사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로 볼 수도 있다. 규제가 풀려 대한항공이 올해 국제선까지 저가항공을 취항하게 되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금호아시아나가 부산국제항공을 선택한 것을 두고 색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동안 호남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것을 탈피하기 위해 부산을 택했다는 것이다. 즉, 저가항공 사업진출이 ‘동진정책’의 신호탄이라는 것. 회사 측에서도 이것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산에 기반을 둔 지역항공사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만큼 ‘호남 색 빼기’가 절실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박 회장도 “저가항공사에는 부산 출신 젊은이들만 고용할 것”이라며 부산 민심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박 회장의 희망대로 부산시민들이 금호아시아나에 그렇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부산지역 시민단체들은 금호아시아나가 부산국제공항의 최대주주로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이제 부산시민들의 편의와는 상관없는 노선이 편성될 것이란 게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다.
이처럼 박 회장이 호남기업 이미지를 벗어나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새롭게 탄생할 정권에서 금호아시아나가 역차별을 받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금호아시아나는 지난 10년간 특혜 시비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승승장구해왔다. 하지만 새롭게 출범할 정권은 영남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박 회장으로서는 ‘호남 색 빼기’를 더 이상 미루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금호아시아나는 올해 10대 그룹 중 가장 많은 2600명의 고용계획을 발표하며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기조에 발맞추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