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능환 전 대법관 부인 김문경 씨가 운영하는 K.M.K 야채가게 전경. 현재 휴업 상태다. 최준필 기자
임기를 4년 이상 남겨두고도 “소임을 다했다”며 사직서를 제출한 김능환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평소 바라왔던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 대다수의 대법관이 퇴임과 동시에 대형 로펌에 들어가거나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는 것과 달리 김 위원장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은 채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는 것.
반면 아내 김문경 씨는 남편의 퇴임과 동시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공직자 남편을 둔 아내로서 그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김 씨는 지난해 “이제 공직이 끝났으니 나도 뭐 좀 해보자”는 마음에 평소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채소가게를 열었다. 바로 옆에 작은 편의점도 함께 시작했다.
공직생활을 할 때도 7억 원 상당의 아파트를 제외하면 별다른 재산이 없었던 김 씨는 남편의 퇴직금을 모두 쏟아 부어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가게 위치도 집에서 자동차로 40분여 떨어진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한 아파트 상가로 잡아 자신들을 알아본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김 씨의 채소가게는 문을 닫은 상태. 추운 날씨 탓에 채소를 보관하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장사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 휴업을 결정했다고 한다. 물론 장사를 아예 접은 것은 아니다. “여러 업종을 고려해 날이 풀리면 다시 장사를 할 것”이라는 게 주변 상인들의 말이다.
SBS 방송에서 캡처한 채소가게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김문경 씨.
실제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에게 “이 가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김 위원장의 부인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이 뒤따랐다. 편의점 단골손님을 자청하는 한 아주머니는 “집이 가까워 오가는 길에 채소가게도 자주 들렀었다. (김 씨는)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하는 분이라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진 못했지만 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며 “한 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진열을 가다듬고 주변 정리를 했었다”고 말했다.
같은 건물을 사용했던 사람들도 김 씨의 ‘신분’을 몰랐던 건 매한가지. 바로 옆에서 수개월을 지켜봐왔던 이웃상인도 “그냥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시장 아줌마 같았다. 늘 허름한 옷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무거운 짐은 직접 머리에 이고 다닐 정도로 소탈했다”며 “오히려 장사를 시작할 땐 너무 초보 같아 주변사람들이 ‘저러다 망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는데 그렇게 높으신 분의 아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뒤늦게 정체를 알게 된 이웃들에게 ‘평소의 김 씨 모습’에 대해 묻자 하나같이 “그냥 채소가게 아줌마”였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른 새벽 도매시장에 나가 물건을 사오는 것은 물론이고 운전도 직접하고 다녔단다. 김 위원장이 때때로 시장에 동행하기도 했지만 직접 가게를 지키지는 않았다고. 채소가게는 온전히 김 씨가 꾸려나가는 공간이었다.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은 가게이니만큼 애착도 남달랐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먼 거리를 오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다른 이웃상인은 “한 번은 제주도에서 유기농 제품을 들여왔다며 파는 모습을 봤다. 그만큼 채소가게에 신경을 많이 썼다. 가게 간판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김 씨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는데 생각만큼 장사가 잘 안됐다”며 “주변 가게들이 워낙 싸게 파니 김 씨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상가 중에서는 김 씨의 가게가 제일 좋은 위치였는데 돈도 못 벌고 비싼 월세만 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시원치 않았던 수입과는 별개로 김 씨는 늘 밝은 모습만을 보였다고 한다. 종종 채소가게를 이용했다는 인근 아파트 주민은 “장사를 할 땐 거의 매일 얼굴을 봤다. 무더운 날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빈 박스를 정리하는데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더라. 한 번씩 반찬을 만들어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등 참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며 “다시 가게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돼주셨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전화전쟁 치르는 이웃상인들 “채소 사고 싶은데 위치가…” 김문경 씨의 채소가게가 전파를 탄 뒤 인근 상점들이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특히 김 씨의 가게와 나란히 위치해 있어 의도치 않게 연락처가 노출된 부동산중개업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의전화가 걸려온다. 대부분이 가게 위치를 묻는 전화다. 때론 채소를 구입하고 싶다며 대뜸 김 씨의 연락처를 묻는 이들도 있다. 그 때마다 중개업소 직원은 “최근엔 장사를 하고 있지 않아 찾아와도 소용이 없다”고 설명한 뒤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가끔은 난감한 전화로 진땀을 빼기도 한다. “돈 걱정 없는 사람들이 채소장사를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옆에서 봐왔으니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것 없느냐”며 다짜고짜 따지는 이들부터 휴업상태라는 말에 “모든 게 다 쇼였냐”며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이웃상인들은 김 씨가 그랬듯 늘 웃는 얼굴로 전화기를 받아든다. 앞서의 중개업소 직원은 “업무에 지장을 받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니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받고 있다. 적어도 내가 지켜본 김 씨의 모습엔 가식이 없었기에 이럴 수 있는 거다. 다른 사람들도 김 씨의 진심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