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 최장수 CEO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는 오는 5월 15일 창립기념일에 맞춰 대표이사직을 사임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1999년 삼성테스코홈플러스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후 지금까지 14년간 홈플러스를 이끌어온 이승한 회장은 ‘유통업계 최장수 CEO(최고경영자)’로 유명하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 공채 출신으로 회장비서실 신경영추진팀장,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이사를 거쳐 삼성과 영국 테스코의 합작회사인 삼성테스코 창립을 주도했다. 1999년 홈플러스 사장, 2008년 홈플러스그룹 회장에 오르며 홈플러스를 유통업계 강자로 성장시켰다.
유통업계뿐 아니라 재계에서도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14년간이나 CEO 자리를 지킨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영국 테스코 본사가 지금까지 이 회장의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경제민주화로 쩔쩔 매는 재계 분위기와 유통업계에 부는 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최근 홈플러스의 실적과 이미지가 모두 추락한 것이 최장수 CEO의 대표이사 사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적지 않은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업계 관계자는 “비록 회장이기는 하지만 월급쟁이는 때 되면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이 회장의 대표이사 사임은 홈플러스의 최근 분위기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홈플러스는 영국 테스코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2000년대 대형마트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 이 회장은 한·영 합작회사에 불과했던 홈플러스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 회장은 창립 당시 업계 12위였던 홈플러스를 국내 2위 업체로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홈플러스그룹을 재계 47위권까지 올려놓았다. 이것이 이 회장이 14년간 CEO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삼성과 테스코는 2011년 완전히 결별했다.
대형마트가 포화 상태에 다다르면서 이 회장에게도 검은 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기업형슈퍼마켓(SSM) 등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만 도리어 지역 중소상인들과 마찰만 빈번해졌다. 여기에다 협력업체와 관계마저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이 속속 들통 나면서 홈플러스 이미지가 적잖이 실추됐다. 홈플러스 협력업체 관계자는 “대형 유통업체 중 홈플러스가 중소상인, 협력업체와 갈등이 제일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귀띔했다.
실적도 하락하는 추세다. 지난 21일 지식경제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 1월 대형마트 3사의 매출은 전년 동월 대비 무려 24.6%나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홈플러스만 따지면 그나마 선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홈플러스 측은 “지난 1월 매출은 전년 동월 대비 14.2% 하락했다”며 “정확한 매출액은 영국 본사 규정상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이미지 관리 실패와 매출 부진, 신사업 발굴 부재 등이 겹쳐 결국 이 회장이 물러난 것으로 보는 업계 관계자가 적지 않다. 유통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대형마트가 경제민주화 칼날의 타깃이 되고 있는 데다 협력업체와 관계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지난해와 달리 지금은 오히려 업계 분위기가 차분해진 듯하다”며 “너무 많이 맞아서 내성이 생긴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홈플러스는 지난 21일 왕효석 홈플러스테스코 대표도 이 회장과 함께 대표직에서 사임할 것임을 밝혔다. 홈플러스 측은 “왕 대표가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에서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과 왕 대표의 사임을 두고 ‘분위기 쇄신용’ 혹은 ‘책임성 경질’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아무리 월급쟁이 CEO지만 분위기와 실적이 계속 좋았다면 사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홈플러스 관계자는 “CEO자리에서만 물러날 뿐 홈플러스를 위해 더 큰 일을 하실 것”이라며 “경질이라면 본사에서 경영자문 역할 등 큰일을 맡기겠느냐”고 부인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정용진은 또 왜… 책임경영 강화? 책임회피 아니고?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이 대표이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밝힌 지난 19일, 공교롭게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역시 공시를 통해 신세계와 이마트 등기이사직에서 모두 사퇴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세계 등기이사직은 2010년 3월부터, 이마트 등기이사직은 신세계와 이마트가 분할된 때인 2011년 5월부터 맡아왔다. 신세계그룹 측은 “각 사 경영진의 책임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각 사 전문 경영인들이 기존 사업을, 정용진 부회장이 미래 성장을 위한 신성장동력 사업 추진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세계 측의 이 같은 입장 표명은 흡사 SK그룹이 최태원 SK(주) 회장이 그룹회장직을 내놓았을 때를 연상시킨다. 재계 한 고위 인사는 “경영권을 쥐고 있는 오너가 단순히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책임경영이 강화되겠느냐”고 반문하며 “오히려 문제가 생기더라도 등기이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라고 지적했다. 정 부회장은 실적 부진에 시달릴 뿐 아니라 계열사 부당지원 의혹, 직원 불법사찰 등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일각에서 ‘경제민주화의 첫 타깃은 신세계’라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다. 이런 시기에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한 것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의구심을 줄 수 있다. 정 부회장은 또 즐겨 하던 페이스북 주소마저 폐쇄하면서 본격적으로 ‘잠행’에 돌입했다.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이사직 사퇴는 검찰조사 등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