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앤장에서 변호를 맡았지만 실형을 받은 이호진 태광 전 회장(왼쪽), 최태원 회장(아래), 김승연 한화 회장(오른쪽). 일요신문 DB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국가 경제 발전기여’나 ‘국가 경제에 미치는 충격’ 등의 관행적 양형인자들을 인용해 가며 재벌 봐주기식 판결을 내리던 때와 법원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이어진 일련의 재벌 총수 관련 사건들에서 의뢰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변호인들이 항소심에서는 재선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국내 최대, 최고라 평가되는 법률사무소 김앤장의 경우 면치레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대기업 총수 관련 재판은 줄잡아 10여 건에 달한다. SK의 최태원 회장이 계열사 자금 횡령 등의 혐의로 법정구속됐고, 한화 김승연 회장은 지난해 8월 배임 등의 혐의로 법정 구속됐지만 건강 악화를 이유로 지난 1월 8일부터 두 달간 법원으로부터 구속집행이 정지된 상태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2월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은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됐다가 역시 건강상 이유로 보석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금호, 하이마트, LIG, 오리온 등의 전·현직 총수들도 재판이 진행 중이며,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경우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이처럼 재판에서 이길 경우 거액의 수임료를 기대할 수 있는 대기업 총수 재판들이 줄을 잇고 있지만, 김앤장은 울상을 짓고 있다. 1심에서 줄곧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항소심을 타 로펌에 뺏기고 있는 것.
SK는 최근 1심을 담당한 김앤장 변호사들을 대신해 태평양 소속 변호사들을 대거 선임했다. 새 변호인단에는 서울중앙지법원장을 지낸 이인재 변호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출신 한위수 변호사 등이 포함됐다. SK 관계자는 “오너 관련 재판의 경우 항소심에서 다른 변호인단을 꾸릴 경우 개인 정보 누출로 인한 리스크가 있긴 하다”면서도 “하지만 똑같은 논리나 전략으로는 항소심에서도 가망이 없기 때문에 변호인단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앞서 1심에서 김앤장을 택했던 태광그룹도 이호진 전 회장뿐 아니라 이례적으로 이 전 회장의 어머니 이선애 전 태광 상무까지 법정 구속되자 이후 법률대리인을 법무법인 율촌으로 갈아탔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지난 2007년 ‘보복 폭행 사건’에서 김앤장을 선임했다가 구속을 면치 못하자 그 후로는 김앤장을 선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김앤장이 헤매고 있는 사이, 국내 3대 로펌 중 한 곳인 태평양의 주가는 올라가고 있다. SK 최 회장 외에도 한화 김 회장의 경우도 최근 항소심 준비를 위해 변호인단을 태평양 중심으로 재편했다.
또한 국회 청문회와 국정감사에 불출석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부사장 남매도 태평양에 사건을 맡겼다. 태평양은 지난해 300억 원대 회사돈을 횡령·유용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의 항소심을 맡아 집행유예 선고를 이끌어 냈다. 태평양은 또한 최근 끝난 4조 원대 삼성가 유산 1심 소송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승리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앞으로 고위 법관을 막 그만둔 ‘전관’보다는 사건 실적 위주의 변호인단 선임 사례가 늘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사례를 봐서도 알 수 있듯, 경제민주화와 더불어 재벌에 대한 양형이 무거워지고 있다”며 “전관을 따지기보다는 사건 종류별로 수임 건수나 승률 등을 꼼꼼히 따져서 변호인단을 꾸리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
화우가 삼성에 맞선 까닭 반대편 수임도 큰 떡 삼성가 유산 소송에서 완패했지만 법무법인 화우는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을 대리했다. 화우는 대 삼성 재판에 강점을 보이며 ‘삼성 킬러’로 통하는 로펌이다. 과거 ‘삼성자동차 채권단 사건’, ‘삼성반도체 근로자 백혈병 사망 사건’ 등 굵직한 사건에서 삼성의 반대편에 서 일부 승소 판결을 이끌어 낸 전력이 있다. 재계 관계자는 “가장 큰 기업 고객인 삼성의 물량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법무법인이 화우밖에 없다”며 “화우는 이 점을 차별화 포인트로 갖고 삼성 관련 소송을 잇달아 수임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