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 고 정주영 명예회장 7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왼쪽)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 가족들이 속속 모이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한데 ‘현대IB’라는 ‘간판’을 놓고 일이 꼬여가고 있다. 현정은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 산하 현대증권 쪽에서 법적대응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현대가의 ‘간판분쟁’, 그 알려지지 않은 이면과 예상되는 후폭풍을 추적했다.
지난 12일 신흥증권은 사명 변경을 발표하면서 “현대증권과 논의를 통해 영문명으로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현대증권 측은 곧바로 “논의 연락은 있었지만 합의한 바 없다”고 맞받아쳤다. 일단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사명 발표 전 양쪽의 최고위급 인사가 만난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엇갈린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차 최고위 인사가 찾아와 걸맞은 예우를 했을 뿐, 이를 합의나 협의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두 분이 만났을 때 양해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증권 쪽 실무진이 내용을 잘 몰라 그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차 쪽의 합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대증권은 지난 21일 서울중앙지법에 ‘HYUNDAI IB 증권’ 사용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일요신문>이 처음 공개하는 상표 출원 과정을 볼 때 ‘현대IB증권’에 대한 상표(금융업종은 서비스표)권은 현대증권 쪽에 더 가깝다.
현대증권 측은 현대차가 신흥증권 인수를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을 공시한 지난 1월 14일 ‘현대IB증권’이란 서비스표를 출원했다. 신흥증권이 현대IB로 이름을 바꿀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발 빠른 행보였다. 현대증권은 이후 ‘현대IB투자증권’ ‘현대M증권’ 등 ‘현대’를 사용해 증권업에 쓸 수 있는 서비스표 20여 가지를 계속해서 출원했다. 신흥증권 측의 ‘HYUNDAI IB 증권’ 출원보다 빨랐다.
특허청에 출원된 서비스표는 심사를 거쳐 상표등록이나 거절결정을 받게 된다. 특허청 관계자는 “심사 중인 사안에 대해선 언급할 수 없다”면서 “다만 원칙적으로 상표(서비스표)는 실제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먼저 출원한 쪽에 우선권이 있다. 유사성은 외관(모양), 관념, 칭호(발음) 세 가지 측면에서 심사하는데 영문 한문과 관계없이 일반인이 쓰는 발음이 같다면 유사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현대차 관계자는 “우리도 현대인데 현대를 쓰지 못할 일이 없다. 그룹 법무팀에서 검토해서 진행하는 일이다. 문제없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출원도 늦은 데다 발음도 유사한 현대차 쪽이 불리해 보인다.
결국 현정은 회장도 인정한 ‘현대의 정통’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 쪽이 ‘현대’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정몽구 회장과 현정은 회장의 ‘담판’이 있다면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이에 대해 현 회장은 지난 20일 “계열사가 알아서 할 일”이라면서 “서로 혼돈하지 않는 범위에서 조정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밝히고 곧바로 법적대응에 들어가 타협의 여지가 줄었다.
재계 일각에서는 현 회장의 현대증권 쪽이 칼자루는 쥐고 있지만 ‘끝까지’ 가기엔 부담이 있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지금껏 범 현대가와의 ‘적통전쟁’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정몽구 회장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가의 장자가 현대를 쓰지 못하는 현실’을 정 회장이 용인하겠느냐는 반문이다.
또 다른 쪽에서는 현대증권의 반발이 뻔한 상황에서 정 회장이 현대IB를 강행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고 분석하기도 한다. 범 현대가가 현대그룹 사업영역을 ‘각개전투’로 치고 나가는 ‘현씨 현대 고사작전’에 합류했을 수도 있다는 것. 현대차가 증권업에 뛰어든 것 자체가 그 시작이라는 시각이다.
최근 현대차 측은 그동안 현대증권에 맡겨놨던 2조 7000억 원대 대주주물량(주식 등)을 회수해가겠다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현대증권 관계자는 “고객의 자산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면서 “다만 그 부분이 빠져나간다 해도 매매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회사 수익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력 유출도 우려되는 상황. 현대증권으로선 타격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
범 현대가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정몽준 의원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2월 중국 하이난항공그룹과 5 대 5로 합작, 홍콩에 해운(벌크선)사 설립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컨테이너가 전문인 현대상선과 직접적으로 부딪치진 않겠지만 현대그룹의 주력인 현대상선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배’가 어디로 갈지 아직 알 수 없다.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도 최근 세계 5위의 엘리베이터업체인 핀란드 크네엘리베이터와 승강기 공동판매 계약을 했다. 이는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업계 1위 현대엘리베이터의 영역. 최근까지 범 현대가가 ‘재결집 모드’였다면 이제 ‘실행 모드’로 바뀐 게 아니냐는, 그리고 여기에 정몽구 회장도 이에 동참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한편 최근 김지완 사장의 사퇴로 공석인 현대증권 사장 자리에 노치용 부사장이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부사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대표이사로 있을 때 6년여 동안 비서실장을 지낸 인물. 증권가 일각에선 현대건설 인수에 사활을 걸고 있는 현정은 회장이 ‘정치력’을 강화하려는 포석으로 풀이한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그런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가 될지 알 수 없다”며 부인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