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각에서는 정몽구 회장이 기아차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정의선 사장의 몫으로 그룹의 새로운 주력사업인 현대제철을 맡길 것이라는 전망도 나돌고 있다. | ||
기아차 실적 부진으로 계속해서 경영자질 시비에 오르내릴 것을 우려한 조치라는 관측이 주를 이루지만 정몽구 회장이 후계구도 안착을 염두에 두고 칼을 뽑아들기 위한 전초 작업이란 평도 눈길을 끈다. 정 사장이 지난 1월 3일 모하비 신차발표회에 참석해 ‘턴어라운드’(실적 호전)를 자신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대표직을 내놓게 된 진짜 속사정은 무엇일까.
지난 2005년 3월 정의선 사장의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직 입성은 ‘대관식 임박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2006년 3월 현대차 비자금 사태만 터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정 사장 후계작업이 안정궤도에 접어들었을 것이라 평하는 인사들도 많다. 그만큼 정 사장 체제 안착의 시금석이 돼줄 것이라 믿었던 기아차 대표이사직에서 정 사장을 끌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정 회장의 속내가 무척이나 쓰렸을 듯하다.
정 사장의 대표이사 취임 직전인 2004년 당시 5000억 원에 달했던 기아차의 영업이익은 정 사장 대표 체제가 뿌리내린 2005년 700억 원으로 감소하더니 2006년엔 1200억 원, 그리고 지난해엔 550억 원의 적자를 각각 기록했다. 게다가 최근 2년 연속 무배당에 대한 주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툭하면 기아차 자금위기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정 회장이 자질 시비가 불거질 수밖에 없는 기아차 대표이사직에서 정 사장을 잠시 빼내준 것이라는 해석이 적지 않다.
정작 주목할 부분은 다음 수순. 정 회장이 정 사장에게 추후 어떤 자리를 맡길지에 대한 관심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경영권 승계를 마냥 제쳐둘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사장이 확보한 유력 계열사 지분이라곤 기아차 1.99%뿐이다. 이런 까닭에 정 사장이 지분 31.88%를 보유한 물류 계열사 글로비스에 대한 그룹 차원의 물량 지원 후 글로비스 지분 매각을 통한 기아차 지분 매입 가능성이 나돌아왔다. 여기서 불거질 도덕적 논란을 어느 정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유력 계열사 대표 경영자로서의 검증이 필요할 것이란 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 회장이 일단 기아차 대표이사직을 내놓은 정 사장을 그대로 두진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 관계자들은 정 사장이 조만간 기아차 대표직에 복귀하는 수순을 점쳐보기도 한다. 이번 주주총회를 통해 정 사장 대신 김익환 부회장이 새로 대표이사진에 합류했다. 만약 정 사장의 대표직 하차 이후 기아차 실적이 개선된 뒤 정 사장이 다시 대표이사진 명부에 이름을 올리면 무임승차라는 소릴 듣기 십상일 것이다. 기아차가 지금보다 더 악화된 상태에서 ‘구원투수’로 정 사장을 재투입하기도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때문에 일각에선 정 사장이 현대차그룹의 새로운 주력사업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에 주목한다. 수익성과 명분이 보장될 것으로 보이는 현대제철이 그 대상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오는 2011년 현대제철이 짓는 고로(용광로)가 완성되면 현대차그룹은 현대제철에서 생산한 철강재를 현대·기아차에 공급하는 수직계열화를 이루게 된다. 현재 포스코의 철강재 공급량이 모자라 국내 업체들이 비싼 값에 중국산을 수입해 쓰는 점을 고려할 때 고로 완성 이후의 현대제철은 탄탄대로를 걷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제철사업이 고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진행된 숙원사업이란 점에서 정 사장이 현대제철을 궤도에 올려놓는 조타수 역할을 통해 그룹 경영권 승계 명분을 축적하려 할 것이란 지적이다. 그러나 수익성이 보장된 현대제철에 입성할 경우 ‘잘해야 본전, 못하면 망신’이란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는 점이 걸린다.
신흥증권(현대차IB증권) 인수로 그룹의 새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 주목받는 금융업이 정의선 사장 몫이 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런데 정의선 사장이 금융업에서 평가를 받기 위해선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을 이끄는 정태영 사장이라는 만만치 않은 벽을 넘어서야 한다.
정 회장의 둘째사위이자 정 사장의 매형인 정태영 사장이 지난 2003년 10월 현대카드·현대캐피탈 대표이사직에 취임한 이후로 적자에 허덕이던 현대캐피탈의 영업이익이 2005년부터 흑자로 전환, 현재 업계 부동의 1위에 올라있으며 2004년까지만 해도 2000억 원에 가까운 영업손실을 내던 현대카드 역시 매년 수천억 원의 영업이익을 남기는 우량기업이 됐다. 이런 까닭에 정태영 사장은 기아차 실적부진에 허덕여온 정의선 사장과 곧잘 비교되기도 했다.
얼마 전 기아차와 위아(옛 기아중공업)는 현대커머셜 보유지분 각각 15%를 정태영 사장 부부에게 매각했다. 정 사장은 10%, 부인 정명이 씨는 20%의 현대커머셜 지분을 확보하게 됐다.
현대커머셜 지분구조를 보면 현대차가 50%를 확보해 최대주주로 돼 있으며 현대모비스도 20%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거꾸로 정태영 사장 부부의 현대커머셜 지분 매입을 정의선 사장의 금융업 진출 계기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증권사의 지급결제 업무가 허용되는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시행이 2009년 2월로 다가온 터라 현대차 금융업의 중심이 기존의 카드·대출업에서 현대차IB증권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은데도 현대차그룹 계열사들로 구성된 현대차IB증권 인수 컨소시엄에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이 포함되지 못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이는 GE가 지분 43.30%를 보유한 현대캐피탈과 42.95% 지분을 보유한 현대카드를 그룹의 차세대 동력인 금융업의 중심에 놓지 않으려는 포석으로 해석됐다. 이런 까닭에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을 대표하는 정태영 사장의 현대커머셜 지분 매입 역시 정태영 사장의 금융업 독식 차원이 아닌 분가작업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일각에선 정몽구 회장의 인적 물적 지원 속에 현대차IB증권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될 때가 정의선 사장의 숨고르기가 끝날 시점일 것이라 보기도 한다. 기아차를 타고 덜컹거리다 ‘반쯤 내린’ 정 사장, 그는 과연 무엇으로 갈아타고 질주할까.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