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 엎드려 있던 때가 엊그제 같던 두산이 연이은 대형 M&A 성사로 인해 목에 힘주는 모습을 보는 게 배 아파서일까. 최근 재계 인사들 사이에 두산의 M&A 과정을 둘러싼 여러 구설들이 나돌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안 그래도 박용성-박용현-박용만 총수 형제가 두산중공업·두산건설·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직을 차지해 ‘형제의 난’ 이후 그룹 회장직 폐지와 계열사 독립경영제 선언이 무색해졌다는 평을 듣는 두산의 M&A 행보가 낳는 뒷말들을 따라가 봤다.
지난 3월 5일 두산그룹은 동명모트롤 지분 52.9%를 1041억 원에 취득해 계열사로 편입한다고 공시했다. 두산의 동명모트롤 인수가 눈길을 끈 것은 이 회사가 굴삭기용 핵심부품 제조 분야에서 국내 1위 업체고 지난해 영업이익 171억 원, 당기순이익 135억 원을 올린 알짜기업이란 점 외에도 인수주체가 ㈜두산이라는 데 있었다. 업무 관련성이 높은 사업 자회사 두산인프라코어 대신 지주회사 격인 ㈜두산이 나선 것이 시선을 끈 것이다.
이는 지주회사제 전환 작업을 진행 중인 두산그룹의 예비 지주사 ㈜두산의 신규 수입원 창출을 위한 행보로 받아들여졌다. 국내 대기업의 지주사들이 대부분의 수익을 자회사 지분 보유에 대한 배당액과 자회사에 대한 상호·사무실 대여료 등에 의존하는 반면 ㈜두산은 수입원 다각화를 위해 직접 계열사 인수에 참여했다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선 ㈜두산과 두산인프라코어의 지분구조 차이 때문일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두산 지분구조에선 두산 박 씨 일가 친인척이 보유한 지분율만 35.54%를 차지한다. 반면 두산중공업이 지분 32.83%를 보유해 최대주주로 있는 두산인프라코어엔 두산 총수일가의 개인 지분은 거의 없다. 총수일가 5세들의 이름은 올려놓았지만 다 합쳐도 지분율 0.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두산인프라코어의 인수 합병이 회사의 수익을 올려줄지는 몰라도 총수 일가 개개인에 대한 당장의 금전적 이익으로 돌아가지는 않는 셈이다. 결국 사업 자회사가 아닌 ㈜두산이 동명모트롤 인수에 나선 것이 총수 일가의 이윤 창출과 맞물려 해석되는 것이다.
실제로 동명모트롤 인수는 단기간 내에 두산 총수 일가에게 상당한 평가차익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동명모트롤 인수 공시가 난 3월 5일 17만 6000원이었던 ㈜두산 주가는 이후 기대심리를 타고 상승해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3월 31일 19만 1500원까지 치솟았다. 연초만 해도 20만 원을 상회했던 ㈜두산 주가가 침체기에 접어들었을 때 터져나온 동명모트롤 인수 소식은 ㈜두산 주가 재도약의 발판이 돼준 셈이다.
두산가 4세 장손 박정원 부회장의 아들딸을 비롯한 총수 일가의 미성년 일원 다섯 명이 지난 2월 13일에 ㈜두산 5664주를 사들인 점도 눈에 띈다. 이날 ㈜두산 주가는 15만 8000원이었다. 2~18세인 이들 다섯 명이 9억 원에 가까운 돈을 들여 한날한시에 ㈜두산 지분을 사들인 점도 관심을 끌지만 이들의 주식 매입 직후 동명모트롤 인수 효과가 ㈜두산 주가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들 다섯 명이 주식 매입 50여 일 만에 2억 원에 가까운 평가차익을 얻게 된 점이 시선을 끈다.
동명모트롤 인수가 발표되기 20일 전 ㈜두산 지분을 사들인 총수 일가가 M&A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시각. 이 때문에 사업 자회사가 아닌 예비 지주사 ㈜두산의 M&A가 결국 총수 일가의 주머니를 두툼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구설을 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두산인프라코어가 아닌 ㈜두산의 동명모트롤 인수를 그룹 내 역학구도와 맞물려 해석하는 시선도 있다. 두산인프라코어를 이끌고 있는 박용만 회장에게 그룹 경영의 무게가 쏠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에 대한 총수 일가 내 우려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이다.
재계 일각에선 현재 두산가 5남 박용만 회장은 3남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의 지원하에 두산그룹의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일찍 뒷선으로 물러난 상태에서 2남인 박용오 전 회장이 퇴출되고 3남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형제의 난’ 주역이었던 점, 그리고 4남 박용현 두산건설 회장이 의사 생활을 접고 그룹경영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점 때문이다.
박용만 회장이 이끌고 있는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해 7월 미국 밥캣 인수에 성공하면서 화제에 오른 바 있다. 이는 한국기업의 해외기업 인수 사상 최대 규모인 49억 달러(약 4조 7760억 원)짜리 계약이었다.
최근 두산그룹이 M&A계의 큰손으로 거듭난 배경에 두산인프라코어의 국내외 자본에 대한 M&A 무한질주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박용만 회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최대 매물로 평가받는 현대건설 인수전에 대한 참여의사를 피력할 정도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용만 회장의 두산인프라코어가 그룹의 새 캐시카우(Cash Cow·현금창출원)로 주목받는 동명모트롤마저 인수할 경우 그룹 내에서 박용만 회장이 차지하게 될 비중이 지나치게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는 평이 나돌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시각은 국내 재벌가 관행상 두산그룹 장래의 중심에 총수 일가 ‘적통’ 4세 장손 박정원 부회장이 서 있을 가능성에 기인하고 있다. 두산가 3세 장남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 박정원 두산건설 부회장이 지주사 격인 ㈜두산 부회장을 겸직하게 되면서 삼촌-조카 간 대결구도 양상이 펼쳐질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여기에 박용곤 명예회장의 차남이자 박정원 부회장의 친동생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사장도 지난 3월 21일 두산중공업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직에 전격 선임된 것 또한 그룹 내 총수 일가 역학구도와 관련해 많은 말들을 낳는다.
예비 지주사인 ㈜두산 지분구조로만 보면 박정원 부회장의 기세가 박용만 회장을 누르는 듯하다. 박용만 부회장의 ㈜두산 지분율은 현재 3.40%로 조카인 박정원 부회장의 4.24%에 못 미친다. 박정원 부회장의 지분율이 1년 전에 비해 2.78%p 증가한 데 반해 박용만 회장의 지분율은 1년 전과 변함이 없다는 점이 향후 두산그룹 경영권 판도에 대한 호사가들의 상상력을 더욱 부풀려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