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해양의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은 지난 3월 이 회사 주식을 매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보유 중인 31.3%의 대우조선해양 주식을 매각해 민영화하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산업은행 측은 매각 계획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낮은 주가 등으로 매각을 미뤄 왔지만 업황이 좋아지고 있어 더 이상 매각을 미룰 이유가 없다. 앞으로 대우조선해양 매각에 전념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산업은행 민영화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는 터라 산업은행이 보유한 대우조선해양 대우증권 등의 지분 매각은 산은 민영화를 위한 사전 작업 수준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한데 산업은행의 이런 발표에 난데없이 외환은행이 발끈하고 나섰다. 외환은행은 4월 17일 열린 현대건설 주주협의회에서 “산업은행의 대우조선해양 M&A 우선 추진 결정은 8개 현대건설 주주기관들의 이익에 배치된다”며 강력히 반발하는 입장을 밝혔다.
대우조선해양 지분도 갖고 있지 않은 외환은행이 매각에 ‘딴지’를 걸고 나선 이유는 뭘까. 외환은행은 현대건설 지분 12.42%를 보유한 최대주주며 산업은행은 11.17%를 보유해 2대주주에 올라 있다. 외환은행은 현대건설 매각을 추진 중인데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2대 주주인 산업은행의 협조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
그런데 산업은행은 현대건설 인수에 옛 현대그룹 계열사가 참여할 경우 매각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놓고 있다. 산업은행 측은 “전국은행연합회의 ‘채권 금융기관 출자 전환 주식 관리 및 매각 준칙’에 의하면 부실 책임이 있는 옛 사주는 인수 대상자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따라서 옛 현대그룹 계열사들은 현대건설 M&A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채권 금융기관 출자전환 주식 관리 및 매각 준칙’에도 ‘옵션’이 있다. ‘경영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 옛 사주의 경우 평가를 통해 인수자로 나설 수 있다’는 문구가 있는 것. 하루라도 빨리 현대건설 지분을 매각해 자금을 회수해야 하는 입장인 외환은행으로서는 이 조항을 근거로 현대그룹과 KCC 등 예비인수자들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외환은행 측은 “옛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인수자격 여부는 다각도로 검토해 주주협의회가 판단할 사항”이라며 “사회적 분위기나 현대건설 임직원들의 정서는 물론 매각 가치를 높인다는 차원에서도 특정 기업을 배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반면 산업은행 측은 “옛 현대그룹 계열사 등은 회사 회생을 위해 자구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현대가의 현대건설 인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결국 외환은행의 반발은 이렇게 현대건설 매각을 뒤로 미룬 채 머뭇거리던 산업은행이 불쑥 대우조선해양을 먼저 팔겠다고 나선 데서 비롯됐다. 외환은행이 강하게 나오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우군’이 돼줄 것이란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현대건설 CEO를 지낸 이 대통령이 현대가문의 현대건설 인수를 묵인할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여기에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 교체설 등이 대두되면서 현대건설 매각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란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외환은행이 ‘정황’을 바탕으로 산업은행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 금융권의 시각이다.
은행 간의 신경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산업은행과 외환은행이 ‘현대건설이냐 대우조선해양이냐’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사이 갑자기 우리은행이 “그렇다면 하이닉스를 먼저 팔자”며 싸움에 끼어들었다. 우리은행은 하이닉스의 2대주주(8.03%)며 현대건설의 3대주주(10.62%)이기도 하다. 박해춘 우리은행장은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이닉스는 기술유출 등을 고려해 매각해야 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우선적으로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하이닉스부터 팔자는 제안이었다. 우리은행 측은 “박 행장은 현대건설이든 하이닉스든 가능한 빨리 매각해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 것일 뿐”이라고 황급히 해명했지만 양자대결이던 매각 경쟁은 박 행장의 발언 이후 사실상 3각 구도로 변했다는 것이 금융권의 시각이다. 기업 M&A를 놓고 인수자가 아닌 판매자들의 이해가 충돌하고 있는 것은 물론 돈 문제에 기인한다. 상황이 좋을 때 M&A를 해서 보다 많은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먼저 외환은행 입장에서는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는 현대그룹과 KCC 등이 본격적인 경쟁에 나설 경우 인수가격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감안하면 현대건설 매각가격은 6조~8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을 매각하면 엄청난 이득을 챙길 수 있기는 산업은행도 마찬가지. 포스코와 GS, 두산에 이어 한화까지 인수전에 뛰어들면서 8조 원 정도로 예상됐던 대우조선해양 인수 가격은 10조 원을 넘길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우리은행 역시 하이닉스를 팔면 막대한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다.
정치권에서 최근 이명박 정부가 금융기관장 교체에 착수한다는 소문이 흘러나온 것도 해당 은행장들을 조급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분석 또한 힘을 얻고 있다. ‘교체 대상’에 오르지 않으려면 일단 눈에 보이는 실적을 빨리 만들어야 하는데 대형 M&A를 통해 수조 원대의 현금을 확보하면 확실히 눈도장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이런 저런 역학관계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세 은행이 합의점을 찾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