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증권가에 한동안 잠잠하던 ‘구본호 투자설’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LG가 3세인 구본호 씨가 ‘어떤 회사에 투자한다더라’ ‘5% 지분공시가 임박했다더라’ 식의 ‘카더라 통신’이 확산되면서 관련 회사의 주가가 춤을 추고 있는 것.
지난 4월 15일 주식시장에선 구 씨가 넥실리온이라는 회사의 지분 5.06%를 매입했으며 지분매입 공시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메신저를 통해 급속히 퍼졌다. “구 씨가 5.06%의 지분을 취득했으며 조만간 공시가 나온다”는 내용으로, 넥실리온이 ‘제2의 액티패스’처럼 대박주가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다음날부터 ‘당연히’ 넥실리온의 주가는 치솟기 시작했고 이틀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는 등 강세를 이어갔다. 소문이 퍼지던 15일 3000원대 초반이던 이 회사의 주가는 보름 후인 4월 30일에는 6200원대로 두 배가 올랐다.
넥실리온은 LG전자 종합기술원 출신 연구원 여섯 명이 2001년 설립한 DMB 수신칩 전문업체로 지난 1월 30일 상장했다. 600만 명 정도의 꽤 많은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지만 주가가 급등할 만한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으로 증권가는 보고 있다. 그저 ‘구본호가 투자했다’는 이유만으로 주가가 폭등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구본호 투자설’에 당사자들인 구 씨와 넥실리온 측 모두가 황당해하고 있다는 것.
구본호 씨 측은 지난 18일 증권가에 퍼지고 있는 루머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피력했다. 구 씨 측은 “넥실리온 투자설은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구 씨와 만난 적이 있는 일부 인사들이 그의 이름값을 빌려 주가를 띄우려는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구 씨 측은 “근거 없는 소문이 계속된다면 조사를 의뢰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넥실리온 측도 갑작스런 주가급등에 당황해하긴 마찬가지. 회사 관계자는 ‘구본호 투자설’과 관련해 “우리도 개인 주주들로부터 ‘구본호 씨가 투자했다는데 맞느냐’는 문의를 듣고서야 소문을 알게 됐다”며 “구 씨와는 전혀 접촉이 없었다”고 전했다. 더불어 넥실리온 측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지만 구 씨 측에 문의할 방법도 없다”며 답답해했다.
비슷한 시기에 주가가 급등한 엑사이엔씨라는 회사는 언론의 보도가 주가급등을 불러온 경우다. 이 회사는 “구본호 씨가 이 회사에 투자했으며 주가조작이 의심된다”는 내용이 모 언론에 기사화되면서 급등세를 탔다. 엑사이엔씨를 비롯 탄소나노튜브 등의 신소재 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업체들이 집단으로 주가 조작을 했을지 모른다는 심각한 내용이었다.
IT 전자부품소재 전문기업인 엑사이엔씨는 2007년 기준으로 52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탄탄한 회사. 지난해 10월 나노텍을 인수 합병하며 관련 분야 최초로 탄소나노튜브 상용화 전문 기업으로 부상했으며 향후 국내 유력 가전업체들과 납품 계약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나름대로 견실한 성장가도를 이어가고 있던 이 회사는 ‘구본호 투자설’과 이어진 보도로 기업 이미지에 손상을 입자 발끈하고 나섰다. 회사 측은 “그간 쌓아온 기업의 내실 및 역량에 대한 평가조차 절하되고 있다. 오보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구본호 씨 관련 루머는 투자자들의 피해는 물론 해당 회사의 기업이미지까지 훼손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잦아들 줄 모르고 있다. 구 씨의 투자설은 4월 초부터 여러 회사를 넘나들며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증권가 메신저를 타고 국동·케이이엔지·엑사이엔씨·파루 등으로 옮겨 다니며 주가를 심하게 띄우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 이들 종목의 주요 특징은 탄소나노튜브(파루 엑사이엔씨) 등 신소재와 신재생에너지(케이이엔지 등)에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
이들 종목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주가가 롤러코스터를 탄다는 점. 엑사이엔씨는 지난 2월 1만 원을 넘던 주가가 3월 10일경에는 5000원대로 반 토막이 났다가 구 씨의 투자설이 돌자 곧바로 9000원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회사 측의 강력대응 방침이 알려지면서 다시 미끄럼을 타기 시작해 지금은 7000원대에 겨우 턱걸이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동은 4월 들어 10일 연속 연일 상승세를 보이고 주식거래량도 평소대비 5~10배 가까이 폭증하는 기현상을 기록하며 춤을 췄지만 정작 주가는 3월 초 1200원대이던 것이 4월 말 다시 1200원대로 되돌아 와 있는 상황이다. 이렇듯 ‘구본호 투자설’이 주식시장을 휘젓자 구 씨가 실제로 투자한 액티패스가 탄소나노튜브를 재료로 삼아 9일 연속 상한가 행진을 벌이는 등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증권가 한 관계자는 “구본호 투자설이 퍼지는 회사들을 들여다보면 주로 당장 상용화가 어렵고 전문가가 아니면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려운 자원개발, 탄소나노튜브 등 신소재 등의 재료를 이용하고 있다”며 “‘애드벌룬’만 보고 투자했다가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른 증시 전문가는 “구본호 투자설을 퍼트리는 사람들의 실체는 작전세력으로 보이지만 정작 구본호 씨와는 별 유대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며 “구 씨를 잘 아는 척하면서도 그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실체를 숨기는 ‘신비주의 전략’을 쓰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정작 구본호 씨에 관해서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가 거의 없다. 1975년생으로 직계는 아니지만 ‘본’ 항렬 돌림의 범LG가 3세라는 것 정도가 전부다. 즉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동생인 고 구정회 씨가 구 씨의 할아버지며 고 구정회 씨의 3남인 고 구자헌 씨가 그의 아버지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범한판토스의 대주주라는 것 외에는 투자와 관련해서도 구체적인 정보는 없고 소문만 무성한 상태다. 그가 미국 시민권자며 초등학교 때부터 주로 미국과 일본에서 거주했고 금융 쪽 전문가라는 말들도 모두 증권가에 떠도는 소문일 뿐 확인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최근 코스닥 시장에서 구본호 씨가 투자했다는 이유만으로 ‘LG 계열사 탄생’ 내지 ‘핵심 전략 사업’이라는 등의 루머가 급속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