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이 항소심을 통해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 1월 31일 최태원 회장이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법정구속된 지 50일 가까이 지나고 있다. SK 측은 최 회장이 법정구속의 충격 속에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절대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며 강력하게 부인했던 점을 감안하면 아직도 어려운 시간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그럼에도 최 회장이 회사 동료들과 국내외 사업 동반자들의 격려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태원 회장 사건과 관련해 SK그룹은 말을 아끼고 있다. 재판을 통해서 다퉈야 할 사항이라는 것이다. 대신 SK 고위 관계자는 “예상하지 못했던 판결로 당사자인 최 회장은 물론이고 SK그룹 전 구성원이 상당히 충격에 빠졌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향후 항소심 재판 과정을 통해 성실하게 소명해 나가겠다”는 얘기만 전했다.
1심에서 재판부는 사건 전말을 재구성한 뒤 최 회장에게 모든 책임을 지운 바 있다. 그러나 최 회장 측은 그의 경영 스타일과 재정 상태 등을 감안하면 이런 접근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억울해 하고 있다. 이달 중 첫 공판이 시작될 항소심에서 최 회장 측은 새 재판부에 이런 부분을 중점적으로 호소할 듯하다.
재계 관계자들은 1심 선고 직후 최 회장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최 회장은 “재판장님이 많은 검토를 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저로서는 제가 무엇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제가 이 사건을 알게 된 것은 2010년으로, 이 사건 자체를 잘 모른다.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 하나”라고 억울함을 피력했다.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최 회장은 평소에도 없는 말을 하지 않고, 선이 굵은 경영 스타일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사실 최 회장은 지난 재판에서도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특유의 경영 스타일로 임했다. 성과급을 과다 지급해 부외자금을 조성했다는 검찰 주장에 대해 최 회장은 “방법론적으로 틀렸고 부적절했다. 정상적이고 투명한 방법으로 비용이 만들어지고 운영돼야 한다”고 밝혔다.
최 회장의 재산을 관리하던 재무팀이 자신의 개인 비용 8000만여 원을 부외자금과 섞어서 집행한 것이 드러나자 “공적자금과 개인자금이 섞여 나가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은 반성한다”고도 했다. 검찰은 이런 부외자금 조성을 최 회장이 주도했다고 기소했지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비단 이번 사건만이 아니다. 지난 2003년 SK글로벌 사태 때도 최 회장은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당시 분식회계 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일 때 변호인은 “분식은 1970~1980년대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만든 유산으로 현 경영진들의 개입은 미미하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재산뿐만 아니라 부채도 있다. 제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SK그룹 사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이번 사건 1심 재판부가 단기간 사용할 선물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회삿돈에 손을 댔다고 판단한 부분에 대해서 최 회장 측은 그의 재력을 감안하면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항소심에서 펼 듯하다. 최 회장은 2008년 상장 가능성이 높았던 SK C&C의 지분 44.5%를 보유했다. 당시 시가 1조 원대. 검찰은 SK C&C 주식 담보대출이 쉽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SK 측은 제1금융권인 은행을 포함, 금융권 대출이 원활히 이뤄졌다고 밝힌다. 담보가치가 충분해 선물투자금을 만들기 위해 회삿돈에 손을 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횡령 방식은 다수의 개인이 개입하면서 사실상 반공개적으로 진행됐다. 그나마 펀드 구성과 횡령까지의 과정도 꽤나 복잡했다. 이에 최 회장 측은 통상의 범죄에서 발견되는 ‘기밀성·은밀성’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최 회장 정도의 재력을 가진 사람이 이 정도 액수를 마련하기 위해 들킬 가능성이 높고 제3자의 이목을 끄는 방식으로 회삿돈을 횡령하려 했다는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최 회장 측은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자금부족·선물투자’ 이미지가 잘못된 횡령 논리를 지지했다는 주장도 내세울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최 회장은 경영과정에서 자금부족으로 ‘고난의 행군’을 해왔다. 선친 작고 이후 그룹 오너가 된 최 회장은 사촌형제와 동생들의 상속포기로 오너가 됐지만 상속세를 낼 돈이 없어 5년간 분납을 해야 했다. 2004년에는 외국계 자본인 소버린자산운용이 최 회장의 허약한 자본력을 악용, 적대적 M&A(인수·합병)로 경영권 침탈을 시도했다. 최 회장은 소버린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자금력을 총동원해 경영권을 방어하면서 겨우 수성에 성공했다.
이 모두가 지분은 있지만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자금이 부족해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이었다. 최 회장 입장에서는 경영권 안정을 위한 재원확보 필요성을 여실히 느끼게 한 계기가 됐다. 2008년부터는 손을 끊었지만 재원조달의 한 방안으로 선물투자가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경영권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최 회장 측의 얘기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과거 최 회장의 선물투자에는 ‘경영권’이라는 단어가 동반되지만 이번 사건에는 그런 연결고리가 없다는 점은 작지 않은 차이점”이라고 분석했다.
1심 판결로 SK그룹엔 ‘비상등’이 켜졌다. 최 회장은 올해 SK그룹의 경영체제를 개편하면서 본인은 글로벌 경제 영역 확장을 위해 모든 것을 걸겠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최 회장의 손발이 묶여 버리게 돼 타격이 불가피하게 됐다. 곧 시작될 항소심에서 최 회장의 명예회복과 SK그룹의 정상화가 가능할지 주목된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