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회장. | ||
지난 5월 27일 보령제약은 ‘김은선 부회장이 9만 5000여 주를 추가 취득, 총 35만 8155주(12.10%)를 보유하게 돼 주요주주에 추가됐다’는 공시를 냈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보령그룹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사실상 마무리 됐다”는 평가를 내놨다. 김은선 부회장의 그룹 장악력이 안정궤도에 들어섰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김은선 부회장이 보령제약 지분 12.10%를 가진 개인 최대주주임은 물론 김 부회장의 장남 유정균 씨도 1.38%를 보유하는 등 전형적인 가업승계 ‘로드맵’을 따르고 있다.
제약그룹인 보령그룹에서 보령제약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룹의 모태이자 주력인 회사다. 보령그룹은 현재 보령제약을 필두로 보령메디앙스(화장품·일용잡화) ㈜보령(부동산임대·건강보조식품) 보령바이오파마(제조·양약) 킴즈컴(광고대행·출판) BR네트콤(소프트웨어) 보령수앤수(건강기능식품 판매 및 방문 판매) 등 7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보령그룹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눈길을 끄는 것은 아들 없이 딸만 넷인 ‘딸 부잣집’인 데다 네 자매 중 첫째와 막내만 경영에 참여하고, 둘째와 셋째 딸은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승호 보령제약 창업주는 슬하에 은선 은희 은영 은정 씨를 뒀다. 이들 중 장녀 김은선 보령그룹 부회장은 일찌감치 아버지를 도와 경영 일선에 나섰고, 막내 김은정 보령메디앙스 부사장도 핵심 계열사 CEO로 아버지와 큰언니를 돕고 있다.
몇 년째 ‘부녀경영’을 해오던 보령그룹이 경영권 승계 작업에 본격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 말이다. 김승호 회장의 둘째딸인 은희 씨와 셋째딸 은영 씨가 약속이나 한 듯 지난 4월 25일 보령제약 주식을 각각 15만여 주(5.18%)씩 ㈜보령에 팔아넘긴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이 보유한 보령제약 주식 전량이었다.
㈜보령은 지주회사제 전환을 추진 중인 보령그룹에서 지주사 역할을 할 것이 확실시되는 회사로 장녀 김은선 부회장이 전체 주식의 45%를 보유해 최대주주에 올라 있다. 총수 일가 내 지분거래는 창업주 김 회장의 허락 없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둘째와 셋째가 맏언니 김 부회장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보령에 지분을 몰아준 것이 김 부회장으로의 급격한 권력이동이 시작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거래로 보령제약 주식 한 주도 갖지 않게 된 은희 씨와 은영 씨는 이제 보령제약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됐다.
5월 9일엔 김은선 부회장이 자신 명의 보령메디앙스 지분 14.2% 전량을 막내 동생 김은정 부사장에게 매각했다. 이를 두고 증권가에서는 김은정 부사장이 보령메디앙스를 갖고 그룹에서 독립하는 것 아니냐는 섣부른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보령메디앙스는 큰언니의 허락 없이는 사실상 그룹에서 분리가 불가능한 구조다. 김은정 부사장이 언니의 지분 전량을 넘겨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번에 소유하게 된 14.2% 외에는 기존 보유주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김은선 부회장이 장악하고 있는 ㈜보령은 보령메디앙스 전체 지분의 35.7%를 갖고 있다. 영향력은 높아졌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큰언니에게 있는 셈이다.
▲ 김은선 부회장(사진 가운데)이 보령제약 주요주주에 추가되면서 또 한 명의 여성 총수 탄생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 ||
김 부회장이 부친으로부터 후계자임을 확실히 인정받은 것은 회장실 사장으로 근무하며 ‘NEO21’을 완성시키면서다. ‘NEO21’은 그룹의 21세기 비전을 위한 5년 계획을 담은 것으로 ‘토털헬스케어그룹’으로의 도약과 이를 위해 각 계열사별로 전문화를 확실히 하고 디지털경영의 토대를 쌓는 것 등이 핵심내용. 예를 들어 건강식품은 (주)보령에서, 백신은 보령바이오파마에서 생산하고 보령제약은 제약업에만 전념하는 방식이다.
김 회장이 업무를 꼼꼼히 챙기며 진두지휘하는 스타일이라면 김 부회장은 전문경영인의 책임과 자율경영을 강조한다. 현재 회장 직함은 여전히 김승호 회장이 갖고 있지만 최종 결재권은 김은선 부회장에게 있는 것으로 알려질 정도로 명실상부한 보령그룹의 최고경영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형만 한 아우 없다지만 막내 김은정 부사장의 내공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평이다. 일각에는 김 부사장이 2003년 갑자기 보령메디앙스 부사장으로 ‘깜짝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보령그룹에서 15년 가까이 경험을 쌓았다. 김 부사장은 큰언니가 다녔던 가톨릭대 경영학과 졸업 후 미국 세인트루이스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지난 1994년 보령제약에 입사했다. 1997년 보령메디앙스로 자리를 옮겼고, 2005년 초 전무로 승진한 데 이어 2006년 부사장이 됐다. 김 부사장은 보령메디앙스에서만 10년 넘게 근무한 까닭에서인지 이 회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맡고 있는 보령메디앙스는 유아용 화장품이 주력인 회사. 한때 출산율 저하로 인한 매출감소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김 부사장이 유아의류 쪽으로 사업다각화에 나선 것이 주효하면서 맏언니를 제외한 형제들 중 유일하게 경영일선에 남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까닭에 ‘맏언니에게 언젠가 당당히 자기 지분을 요구하고 나설 것’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처럼 김은정 부사장이 업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자 ‘김 회장이 맏딸로의 지분 승계를 조기에 완료해 추후 자식들 간에 벌어질 수 있는 분란의 씨앗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한편 계열사들과 김 회장 딸들 사이에 벌어진 지분거래에 대해 보령 측은 “경영권 안정을 위한 지분변동이었을 뿐”이라 일축한다. 창업주의 2선 후퇴를 선언할 시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일 뿐 김은선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는 확실해 보인다. 또 하나의 재계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오너들로만 구성된 경영체제가 향후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