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 ||
이력으로만 놓고 보면 국내 최대 금융그룹 KB금융지주 회장직에 황영기 전 회장만큼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다. 황 전 회장은 1982년 금융계 사관학교로 불리는 뱅커스트러스트(BTC) 서울지점 근무를 시작으로 1994년 삼성전자 자금팀장을 거쳐 삼성생명, 삼성투자신탁운용에 몸담았다. 이후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삼성증권 사장으로 있다가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으로 변신, 은행가의 길을 걷는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에 따라 증권사의 지급 결제 기능이 허용되는 등 금융권 내 ‘무한경쟁’이 불가피해진 상황. 국민은행 역시 증권 보험 같은 비은행 업무의 강화를 도모해야 하는 입장에서 황 전 회장처럼 모든 금융 분야를 두루 섭렵한 인물의 입성은 반길 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낙하산 논란이 황 전 회장의 화려한 이력에 흠집을 낼 기세다. 황 전 회장과 이명박 정부가 이어온 돈독한 관계를 보노라면 그 같은 시선도 무리는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직 시절, 우리은행이 서울시의 주거래은행이었던 덕분에 이명박-황영기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할 일이 잦았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엔 한나라당의 외부인사 영입리스트 맨 꼭대기에 황 전 회장 이름이 올라있었으며 외부영입을 주관한 중진 의원이 황 전 회장을 직접 만나 서울시장 출마를 타진한 적도 있다.
지난해 대선과정에서 황 전 회장은 이명박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참여해 이 대통령 당선에 일조했다. 지난해 말 삼성 비자금·차명계좌 파문이 터지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황 전 회장이 차명계좌 개설과 관리를 주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삼성 특검팀은 황 전 회장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삼성 전·현직 임원들이 줄줄이 소환조사를 받는 동안 황 전 회장은 단 한 차례 소환 없이 서면조사만 받은 후 출금 조치가 풀렸다. 이는 형평성 논란과 함께 황 전 회장이 새 정부의 막후 실세가 됐음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 KB국민은행 노조는 회장 선임에 반대하는 신문광고를 내며 반대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 ||
당초 국민은행이 금융지주사 회장과 행장을 분리하기로 결정하면서 첫 회장직은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겸직할 것이란 시선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황 전 회장이 유력 후보들 중 가장 늦게 출사표를 던진 뒤 회장후보추천위원회가 결국 황 전 회장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부 입김 논란으로 이어지게 됐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KB국민은행지부(노조·위원장 유강현)는 황 전 회장 내정 발표 이전부터 반대투쟁을 벌여왔다. 신문에 ‘KB지주사 CEO는 MB 대선유공자 나눠먹기 자리가 아닙니다’란 광고를 게재해 낙하산 논란과 삼성 비자금 의혹을 집중적으로 꼬집으며 자질시비도 걸었다. 노조 관계자는 “결정이 번복되도록 계속해서 투쟁해 나갈 것이며 설사 주주총회(8월 25일)에서 회장으로 최종 결정된다 해도 지속적으로 비판적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 주장했다. 경제개혁연대가 4일 “‘능력’ 이전에 ‘신뢰’의 문제”라며 “황영기 씨 후보지명을 철회하고 시장의 신뢰 받을 인사를 선출해야 한다”는 성명을 내는 등 시민단체들도 압박에 가세했다.
이러한 낙하산 논란 외에 당초 회장·행장 겸임이 유력시되던 강정원 행장이 황 전 회장의 갑작스런 선임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의문이다. 강 행장은 황 전 회장과 젊은 시절 뱅커스트러스트(BTC)에서 경쟁한 적이 있고 각각 우리은행과 국민은행의 수장으로서 라이벌 구도를 연출하기도 했다.
얼마 전 취임한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지난해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상근특보를 지냈으며 이 대통령과는 고려대 동문이다. 금융가에선 ‘황영기-이팔성-박해춘’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황영기 사단’이 꾸려지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강 행장 거취에 대해 황 전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강 행장 임기가 2010년 10월까지 정해져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경쟁관계였던 강 행장과 황 전 회장이 불협화음을 일으킬 경우 정부나 이사회가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를 가늠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