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하가 입주해 있는 강남구 신사동의 빌딩. | ||
제지사업을 해오던 세하(옛 세림제지)는 지난 2005년 해외 유전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세하는 해외유전 개발업체 PLA 등과 함께 컨소시엄(세하컨소시엄)을 구성해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사크라마바스와 웨스트보조바 광구를 소유하고 있는 현지 법인 MGK 지분 78%를 매입했다. 이 가운데 세하의 지분은 25%. 그후 세하는 2005년 10월에 사크라마바스 광구에서 첫 시추작업을 했고 2006년 12월에는 오일층 발견에 성공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올해 5월에는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사크라마바스 광구에 5400만 배럴의 원유가 매장돼 있음을 확인받았다’고 공시하기도 했다.
검찰에 따르면 세하컨소시엄은 유전개발 사업에 뛰어든 이듬해인 2006년 석유공사로부터 수백억 원의 ‘성공불융자금’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성공불융자금이란 성공 확률이 낮은 탐사단계 사업에 대해 정부가 융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으로, 탐사에 성공할 경우 원금에 특별부담금을 징수하고 실패할 경우 원리금의 80%까지 면제해 주는 제도. 검찰은 석유공사 비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세하가 보고서 조작을 통해 원유 매장량을 부풀려 성공불융자금을 받은 증거를 잡고 이 회장을 구속했다.
또한 세하컨소시엄은 지난해 7월 산업은행과 300억 원가량의 투자계약을 맺고 1차로 약 180억 원을 대출받았다. 검찰은 이 과정 역시 석연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성공불융자금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고서 등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것. 현재 검찰은 전문가들의 조언 등을 바탕으로 ‘세하가 개발했다던 사크라마바스 광구에는 쓸 만한 기름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세하컨소시엄이 석유공사와 산업은행에 제출했던 보고서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당초 한 유전평가기관이 사크라마바스 광구의 매장량을 평가한 보고서에는 ‘물과 기름이 섞여 있어 매장량 평가가 어렵고 경제성도 떨어진다’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하가 산업은행 등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이것이 빠지고 ‘추정 매장량이 2억 배럴을 넘는다’라는 내용이 추가됐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보고서가 조작됐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현재 검찰은 수정되기 전 최초 보고서를 입수한 상태라고 전해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대출 사기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검찰의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사건이 더욱 확대될 것임을 내비쳤다. 실제로 지금 검찰은 대출 과정에서 세하컨소시엄의 로비와 정·관계의 부당한 압력이 있었는지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대출에 관여했던 석유공사와 산업은행의 고위 임원들이 소환돼 조사를 받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보고서에 오류가 있음을 알고도 대출을 묵인해준 혐의가 드러났다는 전언이다. 특히 검찰은 노무현 정부의 실세 정치인이었던 A 씨를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로부터 청탁 전화를 받았다”라는 진술이 나왔기 때문이다. 검찰은 “만약 A 씨의 혐의가 사실로 드러나면 세하컨소시엄이 대출받은 돈 중 일부가 비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라고 밝혔다. ‘오일 게이트’란 말이 불거진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이밖에도 성공불융자금의 융자심의위원이었던 B 교수와 자원관련단체 임원 C 씨 등도 검찰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검찰은 세하 등이 허위 공시를 한 것에 대해서도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를 추가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검찰은 다른 해외 유전개발업체에 대한 조사도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성공불융자금을 받았거나 유전개발을 명목으로 대출을 받았던 업체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지난 7월 4일엔 세하와 컨소시엄을 이뤄 카자흐스탄 유전을 개발하던 PLA의 최원유 대표이사가 이 회장과 같은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검찰 조사에 대해 세하 측은 “믿을 만한 기관에 다시 매장량 평가를 의뢰했다. 이 회장이 구속된 것은 맞지만 (보고서 조작이) 아직 사실로 밝혀진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향후 사크라마바스 광구에 실제로 원유가 있는지 여부를 두고 검찰과 세하가 법정 다툼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하지만 세하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소액주주들은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 7월 1일 종가 기준으로 1만 1750원이던 세하 주가는 7월 8일 종가 6980원을 기록했다. 일주일 만에 거의 반 토막이 난 것. 이것은 이 회장 구속 소식과 함께 세하가 부도를 맞을 것이라는 말이 퍼졌기 때문이다.
증권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석유공사로부터 받은 성공불융자금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산업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이 문제다. ‘트리거 조항’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트리거 조항이란 대출금 조기상환 청구권을 일컫는 말로 산업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 기업이 일정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산업은행이 일시에 돈을 상환토록할 수 있는 권리다. 세하의 보고서가 검찰 수사대로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면 산업은행은 이 권리를 행사할 가능성이 큰데 이 경우 세하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소액주주들은 처음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정부기관과 국책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을 만큼 탄탄한 기업이 보고서를 조작할 리 없다는 것. 오히려 수사 발표 후에 대검찰청으로 주주들의 비난 전화가 빗발쳤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구속 사실을 회사 측에서도 인정하자 소액주주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건을 이 회장 개인 비리로 치부하려는 듯한 분위기가 우세해 보인다.
이 와중에 기자는 지난 7월 8일 세하가 위치한 서울 강남의 한 빌딩 앞에서 소액주주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세하와 산업은행이 투자계약을 맺었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고 8000만 원가량을 투자했다는 이 중년 남성은 익명을 전제로 “지금 세하보다는 검찰을 비난하는 게 대세다. 피해자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검찰 수사에 대해 항의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세하가 확신이 없으면 보고서를 다른 곳에 또 의뢰했을 리 없다. 회장의 개인적인 비리가 불거졌을 뿐인데 왜 기업 전체를 매도하느냐”라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석유공사와 산업은행도 한결같이 “우리는 피해자”라고 항변하고 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우리는 보고서를 보고 대출해줬을 뿐이다. 보고서 조작 여부까지는 우리가 알기 힘든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석유공사 관계자도 “세하에 성공불융자금을 준 것은 맞지만 일단 돈을 빌려준 후에 그 용도에 대해서는 일일이 감독하기 힘든 점이 있다. 해외에서 이뤄지는 유전 개발사업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해명에 대해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일단 더 수사를 진행해봐야 정확한 결과가 드러나겠지만 국민의 세금을 방만하게 운영했다는 비판에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