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초 국민연금관리공단(국민연금)에서는 한바탕 격론이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연일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는 주식시장에 연기금의 조기 투입 문제를 놓고 기금운용본부 위원들 간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 대부분의 위원들은 주가 부양을 위한 땜질식 연기금 투입은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결국 국민연금은 지난 7월 10일 코스피지수 1500포인트 선이 붕괴되자 1000억 원 이상의 자금을 동원해 주가를 반등시켰다.
국민연금의 개입으로 장은 회복됐지만 이를 바라보는 세간의 눈은 곱지 않았다. 국민연금이 주식을 매수하기 전날인 7월 9일 김동수 기획재정부 차관이 연기금 투입 필요성을 말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자금이 집행된 것은 국민연금이 지나치게 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
과거에도 연기금이 정부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운용돼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던 사례가 있었다. 특히 기금이사 자리가 공석인 상황에서 연기금 투입이 결정된 것은 향후 임명될 기금이사의 입지를 좁힐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은 “이미 예정돼 있었던 투자일 뿐이다. 올해 이런 목적으로 총 3600억 원이 책정돼 있다”라고 설명했다.
국민연금 안팎에서는 이번 연기금 투입이 박해춘 이사장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내부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박 이사장이 강하게 밀어붙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기획재정부 김 차관의 발언과 맞물려 박 이사장이 인위적으로 주가를 부양하려는 정부의 요청을 받았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박 이사장은 7월 11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기금을 정부 입맛에 맞게 사용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박 이사장이 연기금 투입을 주도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발언 역시 ‘내부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한 립 서비스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박 이사장의 본색(?)은 취임 후 가진 첫 기자간담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현재 운용자산의 17.5%를 차지하고 있는 주식투자 비중을 2012년까지 40%로 늘리겠다고 밝힌 것. 연기금의 최우선 과제를 수익률에 둘 것이라고도 했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리스크 관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증권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주식투자 결과 수익률이 나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연기금은 수익률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무엇보다 안정성이 최우선”이라고 꼬집었다.
비판 여론이 비등하자 국민연금은 “연기금의 주식투자는 종합적인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전제로 한다”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국회예산정책처가 민주당 신학용 의원에게 제출한 ‘2008년 상반기 공적기금 운용현황’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민연금은 주식투자로 4조 3000억 원가량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신 의원 측은 “여전히 주식시장이 불투명한데도 정부가 인위적인 경기 부양을 위해 주식투자 확대 방안을 발표한 것이 굉장히 우려스럽다”라고 말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박 이사장의 전력을 들어 주식투자 확대를 반대하기도 한다. 과거 우리은행장 시절 미국 시장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일이 거론되고 있는 것. 또한 박 이사장이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은 한국투자공사의 메릴린치 투자 또한 최근 수천억 원에 달하는 손해를 봤다는 점도 박 이사장의 투자 계획이 불안하게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다.
국민연금은 이번 투자 방안이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중장기 포트폴리오의 일환이라고 발표했다. 이미 예전부터 주식시장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혀왔는데 새삼스럽게 비난받는 것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박 이사장 개인 견해가 아니고 경기 부양을 위해 급하게 만든 정책도 아니다. 전임 이사장 시절부터 치밀한 준비를 거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 내부에서는 주식시장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기에 왜 박 이사장이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이 방안을 밝혔는지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국민연금에서는 “원래 6월에 계획됐던 기자간담회였는데 기금이사 임명이 계속 늦춰지면서 연기됐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기금이사 임명 절차가 거의 마무리된 상황에서 기금을 운용하는 데 실질적 역할을 하는 기금이사를 빼놓고 국민연금의 장기 투자 방안을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게 자산운용업계와 금융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연기금 투입이나 기자간담회에서의 발언 등을 박 이사장의 조직 장악 수순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동안 박 이사장은 LG카드 사장이나 우리은행장에 취임할 당시 조직 장악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또한 국민연금 사상 첫 민간 금융가 출신인 박 이사장이 전문 관료들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다소 무리수를 둔 것이란 말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얘기는 이미 박 이사장이 취임할 당시 기금이사 공모가 무산되면서 흘러나왔었다. 당시 기금이사엔 20명이 지원해 치열한 경합 끝에 최종후보 세 명이 선정됐지만 박 이사장 내정 소식 이후 보건복지가족부는 최종후보들을 모두 ‘부적격’으로 판정내리며 재공모를 실시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유를 잘 알지 못 한다”며 답변을 피했다.
기금이사 재공모 결과 정성수 전 KB신용정보 부사장, 김선정 전 삼성화재 상무, 김영덕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자금운용실장이 최종후보로 선정됐다. 정 전 부사장은 공모 전부터 박 이사장과의 친분으로 내정설이 돌았던 인물이고 김 전 상무는 박 이사장과 삼성화재에서 같이 일했었다. 또한 김 실장은 1차 공모에서도 최종후보로 올랐다가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결국 누구든 박 이사장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는 평이다. 일각에서는 “박 이사장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기금이사로 앉히기 위해 재공모를 실시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