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혈한으로 인식되는 사채업자도 지인의 치밀한 사기에 속아넘어가 거액을 잃을 때도 있다. 영화 <잔혹한 출근>의 한 장면. | ||
명동 언저리에서 20년을 넘게 전주 역할을 하던 A 씨는 최근 인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하고 자신에 대한 자책과 자성을 부른 한 사건 때문이었다.
A 씨는 가족이 외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일 년에 수차례 외국에 다녀오곤 했다. 길게는 보름 정도에서 짧게는 며칠씩 다녀오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몇 달 전 A 씨는 평소와 다르게 한 달 정도의 일정으로 가족이 있는 미국에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비서를 별도로 불렀다. 한 달 동안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사전에 준비시키고 만일에 대비한 자금 준비까지 완벽하게 지시를 하는 등 준비상황을 점검한 A 씨는 안심하고 출발을 할 수 있었다. 20여 년을 같이 호흡을 맞춘 가족 같은 비서가 있으니 더욱 더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웬걸. 한 달 만에 미국에서 돌아오니 비서가 사표를 써놓고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불길한 생각이 든 A 씨는 즉시 거래은행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 별일이 없었는가를 물어보기 위해서 담당자를 만났다. 그런데 이 담당자의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회장님, 뭔 현금이 그리 많이 필요하셨습니까. 그거 준비하느라고 아주 혼났습니다.” 아니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내용은 이랬다.
A 씨는 한 달 정도 외국에 나가면서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비서에게 통장과 인감을 모두 맡기고 갔다. 그 사이에 이 비서는 “회장님이 필요하다고 하시니 현금 30억 원을 인출하겠다”며 모두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 비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은행 담당자도 “외국에 나가신지 몰랐다. 평소처럼 당연히 비서를 통해서 찾으시기에 그러려니 했고 ‘왜 이렇게 많은 현금으로 찾아가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A 씨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현금으로 30억 원이라면 운반하기도 그리 만만치 않다. 혼자서 하기는 더욱 더 힘든 일이니 공범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A 씨는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을 모두 동원해서 비서를 찾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리무중. 그로부터 사흘 뒤 비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죄송하다. 아직 한국에 있다. 돈은 아직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잘못했다. 곧 돌려주겠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A 씨는 이를 믿을 수 없었다. 전화가 오고도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가끔 연락만 올 뿐 아직까지도 돈은 반환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주먹’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더 비싼 대가를 치를 수도 있어서다. 결국 A 씨는 횡령 혐의로 비서를 고발할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을 동고동락한 비서에게 치욕적인 배신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다칠 각오를 하고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 것이다.
사실 이런 사건의 경우 남에게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사법당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어렵다. 이미 비서는 A 씨의 약점을 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탈세고 가족이 외국에 있으니 불법적인 외환거래가 분명 있었을 터. 그리고 그 비서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은 물론 그 거래를 직접 수행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A 씨는 아직도 악몽을 꾼 것만 같다.
사금융업자 B 씨는 몇 년 전에 자칫하면 유가증권 위조범이 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하소연한다. 대략의 내용은 이랬다.
평소에 친분이 있던 공인회계사 C 씨가 B 씨에게 진지한 상담을 청해왔다. B 씨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배운 것도 많은 전문 직업인인데 상담은 가당치도 않다”고 했지만 C 씨는 “인생 상담이니 부담 갖지 말라”며 “소주나 한잔하자”고 했다. B 씨는 결국 C 씨와 마주앉았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가 무르익자 C 씨의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보좌해주던 준재벌급 회장이 있다. 이 회장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자신의 재산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사실 내가 공인회계사로 일을 봐줬지만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고 비인간적으로 대우받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만두면서 마지막으로 5억 원짜리 CD(양도성 정기예금증서) 두 장을 몰래 챙겼다. 그게 벌써 1년이나 지났다. 만기가 두 달 정도 지났다. 이제는 바꿔도 될 듯하니 도와달라.”
B 씨로선 좀 황당하기도 한 이야기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일면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었다. C 씨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모시는 회장은 전혀 도와주거나 관심도 없었고, 말로만 친하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일종의 배신감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B 씨는 일단 할인이나 만기환급이 가능한지만 알아봐 주기로 했다. 만일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그런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래은행에 가서 담당자에게 사본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하고 만기환급이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대답은 “만기에 다 찾아갔다”였다. 그렇다. C 씨가 모셨다는 회장이 이미 분실신고를 내고 만기에 찾아간 것이다.
B 씨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B 씨가 이런 사정도 모르고 시장에서 할인을 시도했다면 꼼짝없이 위조범으로 몰려 처벌을 받거나 처벌은 면하더라도 시장에서의 신용은 완전히 끝장날 수 있었다. B 씨는 C 씨에게 이런 상황을 알려주며 이렇게 충고했다.
“부자들은 10원, 아니 1원이라도 내 돈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파악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이 그만둔다고 했을 때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모를 것이라는 혼자만의 착각은 하지 말라. 혹시 당사자가 몰라도 하늘은 알고 있다.”
가끔 이렇게 배신 사례가 나온다. 대부분 자신이 가족처럼 대하는 아래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제대로 뒷받침해 주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믿는 사람에게 발등을 찍히지 않으려면 적당히 나누어 같이 잘살아야 한다.
한치호 ㈜중앙인터빌 상무 one1019@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