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보와 기보의 통합 문제가 신·구 정권의 싸움으로 치닫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안택수 신보 이사장, 이명박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한이헌 기보 이사장. | ||
신용보증기금(신보)과 기술보증기금(기보). 중소기업 대출 보증을 담당하는 두 기관에 대한 통합 논의가 금융업계를 넘어 정치권으로까지 확산돼 눈길을 끈다. 정부는 유사기관 통합을 통한 효율성 극대화 차원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두 기관의 통합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쇠고기 파동, 독도 문제 등으로 민심을 잃은 정부를 향해 기보에 의존해온 기술기반 중소·벤처 기업들의 반대 목소리가 커지면서 야당은 물론 여당도 눈치를 살피는 듯하다.
신보-기보 통합 갈등은 양 기관 수장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확전된 상태. 한데 이 두 사람이 이명박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색깔을 대변했던 인사들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양대 보증기금 통합 논의를 둘러싸고 ‘신·구 정권 세력의 대리전으로 비화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배경을 따라가 봤다.
신보-기보 통합 논의는 현 정부 출범 이후 공기업 선진화 방안의 일환으로 진행돼 왔다. ‘업무 중복 공공기관 통폐합을 통한 효율성 제고’ 차원에서 정부의 의견 수렴과정 등을 통해 통합 쪽으로 무게가 기우는 듯했다. 신보 중심의 통합론에 불을 지핀 것은 안택수 신임 신보 이사장이었다. 안 이사장은 지난 7월 22일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신보는 역사가 32년 됐고 보증 규모가 기보보다 세 배 이상 크다”며 “큰집으로 통합하는 게 순리가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신보는 지난 1976년 신용보증을 통해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대한 자금공급을 원활하게 하고 신용 중심 금융환경을 조성, 중소기업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기보는 벤처 붐이 일어나던 1989년 기술산업 기반 육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안택수 이사장의 말대로 신보의 보증규모는 기보의 세 배를 넘고 직원 수도 두 배가량 된다.
이를 근거로 안 이사장이 흡수통합 논의를 공론화시키자 한이헌 기보 이사장이 발끈했다. 한 이사장이 7월 29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신보와 기보는 지난 3년간(한 이사장 재임 기간) 경쟁 체제 속에서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며 “신보는 큰집이 아니라 다른 집”이라 응수한 것이다.
기보를 흡수통합하려는 신보와 이를 저지해 독립기관으로 살아남으려는 기보 간의 신경전은 안택수-한이헌 두 이사장의 정치 이력 때문인지 신·구 정권 세력 간의 힘겨루기로 풀이되기도 한다. 안택수 이사장은 ‘낙하산 논란’ 속에 지난 7월 21일 신보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안 이사장은 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지난 18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탈락해 여당 의원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선출과정 때부터 안 이사장은 줄곧 ‘친 이명박계’ 인사로 분류돼 왔다. 이런 까닭에 금융업계에선 신보 이사장 취임을 공천 탈락 위로 성격의 ‘보은인사’로 보기도 한다. 낙하산 논란에 대해 안 이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국회 재경위원장도 하고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의 기관에 대해 7년간 감사를 했으면 신용보증에 대한 준전문가”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한이헌 이사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로 안 이사장과 마찬가지로 낙하산 공방에 휘말린 전력이 있다. 2002년 지방선거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뜻으로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고 그해 대선에선 노무현 후보 부산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2005년 6월 이사장 취임 당시엔 ‘노 정권의 배려’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당초 색깔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은 현 정권과 ‘소통 중’인 안 이사장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란 평이 대세였다. 안 이사장은 취임식에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대통령께 말씀을 드렸다” “(통합 문제에 대해) 우리가 큰집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등의 발언으로 박수를 받았다. 게다가 안 이사장은 신보 노조의 대대적인 환영까지 받았다. 공공부문 개혁·축소 논의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직원들이 정권과의 교감을 앞세운 안 이사장에게 힘을 실어준 셈이다.
그런데 두 기관의 최대고객인 중소기업들이 기보 편을 들고 나서면서 통합 관련 예측이 쉽지 않게 됐다. 지난 7일 중소기업중앙회와 벤처산업협회,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 한국IT기업연합회, 산학연전국협의회, 대덕이노폴리스벤처협회 등이 ‘기보와 신보 통합에 강력 반대하며 기보의 기능을 특화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건의서를 금융위원회에 제출했다. 최근 유가상승과 국내 경제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의 두 기금 통합은 금융 혼란과 중소기업 지원 축소 등의 악영향을 불러올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나라당 소속 허남식 부산시장마저 지난 11일 신보-기보 통합논의에 공식 반대 입장을 밝히고 나섰다. 기보는 최근 10년간 한나라당 전략적 요충지인 부산지역에 약 11조 원의 보증지원을 해왔다. 통폐합으로 인한 지역경제 타격과 민심 악화 우려 때문에 나선 셈. 한이헌 이사장은 기보 통합 반대 차원을 넘어 아예 신보 역할 축소를 통한 금융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공적보증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들은 대부분 신보의 문제며 신보의 일반보증을 줄이고 기보의 기술보증은 더욱 강화하는 것이 진정한 공기업 선진화라는 논리다.
정부는 지난 11일 발표한 1차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서 신보 기보 통폐합을 제외시켰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는 정부가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한 이사장의 주장이 관철될지는 미지수다. 우선 한 이사장이 퇴임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이사장은 지난 6월 이미 임기 3년을 채운 상태다. 기보 내에서의 한 이사장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이다.
올 때는 ‘낙하산 논란’을 떠안아야 했지만 재임기간 동안 부실기관이었던 기보의 체질을 전면 개선해 공기업 경영평가 최상위 기관으로 거듭나게 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러나 후임 이사장 인선이 이뤄지지 않아 새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는 한 이사장의 목소리에 정부가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 미지수다. 게다가 정부부처 주변에선 ‘노 정권 사람 주장’대로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신보-기보 통합 반대를 주장하는 중소기업 단체 안팎에선 한 이사장 후임 자리가 이 대통령 관련 인사로 채워질 가능성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최근 기보가 지분 82.9%를 갖고 있는 기보캐피탈이 민영화 대상에 포함돼 정부의 기보 힘 빼기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현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기보 통합을 반대하는 기업인들의 목소리, 그리고 신보-기보 수장들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맞물려 통합논의가 어떻게 귀결될지에 관심이 쏠린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