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윤갑근 부장검사)는 지난 11일 이주성 전 국세청장이 단골로 드나든 서울 강남의 유흥업소 두 곳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회계장부 등을 확보했다. 이 전 청장 계좌 조사과정에서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수백만 원이 해당 유흥업소 사장 유 아무개 씨 계좌에 입금된 사실 또한 확인됐다. 계좌 관리를 맡겼던 것으로 보아 이 전 청장은 유 씨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던 듯하다.
이번에 압수수색을 받은 유흥업소 두 곳은 이 전 청장 외에도 국세청 고위인사들이 자주 드나든 고급 업소로 알려진다. 검찰 주변에선 이 전 청장을 매개로 세무당국 인사들과 각계 고위인사들 간의 은밀한 만남의 장으로 활용되며 ‘돈 얘기가 오간 장소’였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이 전 청장 관련 ‘유흥업소 구설수’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검찰은 지난해 초 김흥주 삼주산업 회장(옛 그레이스백화점) 정·관계 로비의혹 수사과정에서 이 전 청장이 국세청 국장 시절인 2001년 9월 유흥업소에서 술자리를 겸한 도박 접대를 받다가 국무총리실 조사심의관실에 적발됐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이후 이 전 청장은 각종 구설수 속에 2006년 6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옷을 벗었다.
이 전 청장이 차명계좌를 만든 시기는 그가 국세청장직에 있던 2005~2006년 사이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까지 드러난 비자금 규모는 수십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전 청장이 세무당국 최고책임자 자리에 있을 때 그런 계좌를 만들었다는 점은 자연스레 자금 출처와 용처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당시에 세무조사를 받았거나 조사 소문만 뿌렸다가 대상에 오르지 않은 대기업들, 그리고 권력을 누리고 있던 인사들의 연관성에 대한 궁금증이 커질 수밖에 없다. 검찰청사 주변에선 이 전 청장 차명계좌와 관련한 뇌물 리스트가 확보됐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일각에선 이 전 청장 수사가 전직 국세청장 한 사람을 옭아매기 위한 것이 아닌, 더 큰 범위의 수사를 위한 전초단계일 가능성도 거론된다.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 전 청장 외에도 대기업 고위임원과 친분이 두터운 전·현 국세청 고위인사가 수사범위에 포함될 것이란 이야기가 나도는 것. 차명계좌 관리가 이 전 청장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을 것이란 전제하에서다.
그러나 검찰에게 전·현 국세청 고위인사에 대한 전 방위적 수사는 적잖은 부담일 것이다. 일단 증거확보가 쉽지 않다. 검찰 관계자들은 “현금 흐름에 밝은 세무 전문가란 특성상 계좌추적이나 수표 거래 등 검찰 수사로 쉽게 드러날 만한 수단 외의 방법들을 사용하기 일쑤라 추적이 간단치 않다”고 털어놓는다. 이 전 청장 조사과정만 봐도 자금흐름 추적이 간단치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검찰과 국세청 사이에 벌어지는 묘한 신경전 또한 이 전 청장 수사를 진행하는 검찰을 편치 않게 만드는 대목이다. 지난해 부산지역 건설업자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함께 1억 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정상곤 전 부산지방국세청장은 최근 징역 4년형이 확정됐다. 정 전 부산청장이 현금 7000만 원과 미화 1만 달러를 뇌물로 건넸다고 진술해 구속기소된 전군표 전 국세청장은 징역 3년 6개월 및 추징금 7947만 원을 선고한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심을 진행 중이다.
신성해운 정·관계 로비의혹 검찰수사에선 ‘전·현직 국세청 간부들의 뇌물수수 증거가 없다’며 국세청 로비 의혹 부분은 내사종결됐다. 하지만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수사기록에 정작 검찰 로비 의혹이 빠졌다’는 논란이 제기되면서 검찰-국세청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마치 검찰이 또 다른 권력기관의 고위인사들을 집중 겨냥하는 듯한 인상은 검찰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대목일 것이다. 이와 관련, ‘이 전 청장 외에 또 다른 국세청 거물급 인사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는 검찰 내 기류가 전해지기도 한다.
일각에선 이 전 청장 차명계좌 발견으로 시작된 이번 사건의 여파가 국세청 조직을 넘어 재계를 향할 가능성에 관심을 보인다. 검찰에 따르면 이 전 청장은 A 그룹과 B 그룹 같은 대기업 고위임원 명의 차명계좌를 개설해 비자금을 관리해왔다고 한다. A와 B 두 대기업은 지난 정권 당시 검찰 수사선상에 올랐다는 소문이 자주 나돌아 주목을 받았다. 총수일가의 차명주식 보유 논란이나 주요 계열사 지분 승계과정에서의 편법 여부가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 곧잘 거론됐고 이에 대한 검찰 조사가 일부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별다른 혐의 없이 귀결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해당 기업들이 다시 한 번 이 전 청장 수사로 인해 도마에 오르게 됐다. 이 임원들은 조사과정에서 “차명계좌가 아닌 내 계좌” “이 전 청장과 고향 선후배 사이라서 명의만 빌려준 것”이라 항변한 것으로 알려진다. 해당 기업 임원들이 개인 차원에서 이 전 청장 계좌를 관리해준 것인지, 아니면 회사 수뇌부 공모가 있었는지가 수사범위 확대 변수가 될 전망이다.
최근 검찰이 재벌가 2·3세들 수사를 대대적으로 벌여온 점 또한 이 전 청장 파문이 재계에 큰 불똥을 튈 가능성을 부추긴다. 대검 중수부는 이미 대우 구명로비 의혹을 받아온 재미사업가 조풍언 씨 수사과정에서 주가조작 혐의로 LG가 3세 구본호 씨를 구속기소한 바 있다. 얼마 전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봉욱 부장검사)는 두산에서 퇴출된 박용오 전 회장 아들 박중원 씨와 현대가 3세 정일선 씨 등의 주가조작 정황을 포착한 상태다.
최고권력층 친인척 연루설이 나돌면서 주가조작 수사범위 확대 여부에 대한 갑론을박도 있지만 어느 때보다 재벌들을 향한 검찰의 눈매가 매서워진 것은 사실이다. 만약 이 전 청장 차명계좌와 관련해 대기업 인사들 이름이 구체적으로 여럿 등장하게 된다면 8·15 경제인 사면으로 모처럼 활력을 찾은 재계가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후폭풍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