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건설 건물에 내건 힐스테이트 아파트 현수막(위)과 대우조선해양 옥포 조선소 전경. | ||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은 가장 풍부한 현금보유고 덕분에 순식간에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의 M&A 참여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현대중공업의 ‘출사표’를 둘러싼 ‘뒷말’들을 따라가 봤다.
그동안 현대중공업은 여러 차례 대우조선해양(대우조선) 인수전 불참 의사를 밝혀왔다. 지난 7월 중순경에는 민계식 부회장이 기자들에게 직접 “관심이 없다”며 일각에서 불거지던 M&A 참여 가능성에 대해 선을 긋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이 인수의향서를 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재계에서는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두산의 포기로 한시름 덜었던 나머지 세 회사들은 오히려 더 센 강적을 만나게 됐다. 현대중공업은 현재 8조 5000억 원가량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자금 면에서 경쟁사들을 압도한다. 대우조선 낙찰가격이 7조~8조 원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FI(재무적 투자자)를 굳이 끌어들이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은 “FI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만큼 자금에 있어서는 자신이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라는 것도 M&A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우조선처럼 덩치가 큰 매물일수록 정치적인 고려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의 갑작스런 입찰 참여를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하락장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23만 9500원(8월 29일 종가 기준)이던 현대중공업 주가는 9월 2일 22만 2500원으로 하락했다. 조선업계에서는 ‘뒤통수를 맞았다’며 말 바꾸기에 대한 비난도 거세다. 대우조선 노동조합(노조·위원장 이세종)도 ‘현대중공업의 인수전 참여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노조 관계자는 “입찰 마감 하루 전에 인수의향서를 낸 것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두 달 전부터 검토해왔다”라고 반박했다.
그동안 현대중공업은 포스코 GS 등 일찌감치 입찰을 준비해 온 기업들과의 컨소시엄 구성을 희망했었다고 한다. 이번 입찰에 참여하고 있는 한 기업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으로부터 (컨소시엄 참여) 요청이 왔었다. 하지만 거절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자금은 풍부하지만 대우조선 노조의 반대가 불 보듯 뻔했고 인수 후에도 주도권을 뺏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라고 밝혔다. 다른 기업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취재 결과 확인됐다. 컨소시엄 참여에 실패하자 현대중공업은 결국 독자 참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재계와 증권가 등에서는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 인수 의지를 낮게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증권거래소 관계자는 “아무리 현금이 풍부하더라도 FI와의 협력을 거절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불참을 선언하긴 했지만 현대건설 인수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현금 모두를 대우조선에 쏟아 부을 가능성은 없다. 갑작스럽게 대우조선 인수전에 뛰어든 것도 인수 의지를 의심해볼 만한 대목”이라고 밝혔다.
현대중공업은 논란이 커지자 지난 9월 2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인수전에 사활을 걸고 있다”라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은 그동안 대한통운 동명모트롤 등 여러 인수전에 참여할 때도 뒤늦게 인수의향서를 제출하며 강한 인수 의지를 밝혔지만 막상 본격적인 게임에 들어가자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
따라서 현대중공업의 목적은 대우조선이라는 매물이 아닌 인수전 참여 그 자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선 현대중공업은 인수전에 참여해 조선업계 3위인 대우조선을 실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현대중공업 측은 “세계 1위 업체가 그런 짓을 하겠느냐”라며 펄쩍 뛰지만 대우조선에서는 “일부 부문에서는 우리가 앞선다. 동종업체에게 속을 내보일 수 없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현대중공업의 입찰 참여는 인수 단가를 높일 수 있는 효과도 있다. 한때 10조 원을 넘을 것이라던 대우조선 인수금액은 그동안 경기침체 및 정부의 M&A 대출 억제 등으로 인해 다소 낮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에 현대중공업이 “자체 보유 중인 8조 5000억 원까지는 써낼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다시 꿈틀대고 있다. 현대중공업으로서는 누가 인수하든 향후 업계의 경쟁자가 될 기업의 ‘출혈’이 클수록 유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재계 일각에선 현대중공업의 인수 참여가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포석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그동안 여러 M&A에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그때마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현대건설 인수전 불참을 선언했지만 언제 뒤집을지 모르는 일. M&A 시장에선 현대중공업의 최종목표는 현대건설이라는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해 특히 현대중공업은 정몽준 최고위원으로 인한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자칫 특혜시비가 일 경우 현대건설 인수전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따라서 연이은 M&A에서의 고의성 짙은(?) 패배는 여론을 우호적으로 형성해 현대건설을 품에 안기 위한 고도의 계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중공업이 국가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도 눈길을 끈다. 최근 현대중공업은 차세대 한국형 잠수함인 ‘손원일함’의 인도 지연이 늦었다는 이유로 부과된 지연손해금 90억 원이 부당하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대우조선 인수의향서를 내는 시기에 소송을 낸 것은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