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사태가 발생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이로 인해 금강산 관광은 중단됐고 현대아산은 하루 수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관광중단이 9월 말까지 지속된다면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 손실액은 400억 원을 넘길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수익의 70%가량을 금강산에서 벌어들였던 것을 감안했을 때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현대아산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현대그룹이 자랑하던 ‘대북 핫라인’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됐다는 것이다. 사태 이후 현대아산 윤만준 전 사장은 수습을 위해 두 차례 방북했지만 두 번 모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현대아산이 접촉하고자 했던 고위층과의 만남이 번번이 무산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채널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던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첫 방문에는 현지 실무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방문에서는 그것마저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윤 사장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던 한 인사는 “국내 기업으로 따지면 과장급 인사가 잠깐 얼굴을 비춘 것이 전부였다.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사업을 해야 하나’라는 회의감이 들었다”라고 털어놨다.
현대그룹은 북한을 달래고 사태 수습을 위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대북사업 관련자들을 대거 교체했다. 윤만준 사장을 비롯해 개성사업단장 이강연 부사장, 관리지원본부장 임태빈 전무 등이 사임했다. 현대아산 신임 사장으론 조건식 전 통일부 차관이 선임됐다. 현대그룹 측은 조 사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특히 통일부 출신인 만큼 정부 당국과의 ‘소통’에 일정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재계 일각에서는 조 사장이 보수적 인사라 북측과의 관계개선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평하기도 한다. 조 사장은 취임 후 기획실과 경영지원본부를 통합하고 신임 본부장에 장환빈 상무를 임명했다. 이는 조직정비를 통해 위기에 빠진 대북사업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렇게 현대그룹이 수렁에서 헤어나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사이 다른 대기업들이 북한으로 달려가기 위해 신발끈을 묶고 있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우선 금호아시아나가 포문을 열었다. 금호는 지난 8월 초 남북 간 물류교역의 창고역할을 하는 도라산물류센터의 일부 사용권을 따냈다. 당시 금호는 입찰 경쟁에서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택배를 물리쳤다. 금호는 이 물류센터를 전초기지로 삼아 중국 베트남 쪽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롯데그룹도 대북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계열사인 롯데JTB가 북한과 일본을 연결하는 새로운 관광 패키지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 롯데JTB는 지난해 롯데그룹이 일본 최대 여행사인 JTB와 합작해 만든 회사. 롯데그룹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에 따르면 롯데JTB는 일본에서 출발해 한국, 북한으로 이어지는 여행코스를 올해 초부터 준비해왔고 지금은 북한당국 등과 협의 중에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다소 침체돼 있는 관광 사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어 성사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이 인사의 설명이다. 다만 일본 정부로부터의 허가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어 공식화하기에는 이르다는 전언. 롯데JTB 관계자도 “아직 북한 관광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안다”라며 부인했다.
비록 롯데 계열사는 아니지만 ‘롯데’라는 상표를 쓰고 있는 롯데관광개발도 현대아산과 경쟁할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지난해 북한은 개성 관광 사업자를 현대아산에서 롯데관광개발로 바꿔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하기도 했었다. 당시 통일부와 현대아산 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됐지만 김기병 롯데관광개발 사장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개성 관광사업에 대한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그 후에도 롯데관광개발은 북한 측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향후 대북 관광사업에서 큰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두 롯데’가 대북 관광사업에 동시 진출할 경우 롯데 일가가 펼칠 경쟁도 대북사업을 보는 관전 포인트로 떠오를 수 있다. 김기병 사장은 신격호 회장의 여동생인 신정희 씨의 남편으로 신 회장의 매제. 지난해 롯데그룹은 롯데JTB를 출범하면서 롯데관광개발을 상대로 ‘롯데라는 상호를 사용하지 말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롯데그룹은 올 5월 승소했고 지금은 양사 합의를 거쳐 롯데라는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같은 여행업을 하고 있는 처지라 언젠가는 다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노릇. 그곳이 북한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이밖에 LG SK 등도 대북사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SK는 이미 지난해 금강산 관광지구에 LPG 충전소 착공식을 열었다. 이어 여건만 허락된다면 에너지·자원 관련 시설도 확장한다는 방침이다. LG는 지난 1997년 중소업체들과 손잡고 대북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중단한 상태. 하지만 중국에 대한 비중이 커지면서 그룹 내에선 북한이 물류 및 생산기지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인프라가 구축되고 불확실성만 제거되면 중국과의 중간 교역지로 북한만 한 곳이 없다”며 이를 뒷받침했다.
정부는 이러한 대기업들의 대북사업 진출 계획에 대해 일단 긍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정권도 바뀐 만큼 다양한 아이템을 가지고 (기업들이) 경쟁체제로 가는 것이 맞다. 북한도 이에 대해 찬성하는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한편 다른 기업들의 대북사업 관련 움직임에 대해 현대 측은 ‘대수롭지 않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다른 기업들의 움직임에 대해선 들어본 바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현 상황에서 그 어떤 기업도 대북사업을 진행할 순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