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브러더스가 세계 4위의 투자은행(IB)이라는 점에서 산업은행이 인수협상에 뛰어든 것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리먼브러더스의 손실이 걷잡을 수 없는 정도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인수에 목을 맨 점이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17일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리먼브러더스 실사과정에서 부채 비율이 상당히 컸다. 인수 검토 과정에서 산업은행이 감내할 리스크 수준이냐, 민영화를 앞둔 시점에 외국계 IB의 인수가 적절한지 검토했지만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오래 전에 내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민유성 산업은행장은 16일 기자간담회에서 “(리먼브러더스와 합의를 했다면) 리먼브러더스가 파산을 안 했을 것”이라며 “우리가 내놓은 구조조정안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상당히 보수적이고 시장 신뢰를 얻을 수 있기에 아쉽다”고 말했다.
전 위원장 말로는 ‘리먼브러더스가 살아나기 어려워 이미 오래전에 인수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났다’는 것이지만 민 행장은 ‘인수했으면 살릴 수 있었다’는 엇갈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 인수전에 적극성을 보여온 데 대해 일부에서는 민 행장이 리먼브러더스 서울지점 대표를 지낸 ‘리먼맨’으로, 스톡옵션을 보유하고 있었던 점과 이명박 정부가 추진 중인 민영화 계획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 등을 들어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난 7월 초 리처드 풀먼 리먼브러더스 회장이 직접 민 행장에게 연락을 취해 인수를 요청했을 만큼 민 행장은 대표적인 리먼맨이다. 이미 정치권에서도 민 행장의 출신을 문제 삼고 있다. 이종구 한나라당 의원은 1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 행장이 1주일, 열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인수협상에 매달린 것은 참으로 의아하다”며 “민 행장이 리먼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리먼 패밀리’라는 말도 있는 만큼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의 가능성도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여기에 민 행장이 리먼브러더스 스톡옵션 6만 주를 보유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리먼브러더스 인수에 성공해 리먼브러더스가 부활하게 되면 민 행장 개인 자산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산업은행 측은 민 행장이 스톡옵션 포기의사를 밝혔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의혹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상태다. 리먼브러더스는 산업은행에 앞서 한국투자공사에 투자의견을 문의했었지만 한국투자공사는 실무진에서 이를 거절했다. 반면 민 행장은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가 대선 당시부터 추진해온 ‘산업은행 IB화’라는 공기업 민영화 핵심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겠다는 의욕도 더해졌을 것으로 금융계에서는 보고있다.
민 행장은 인수 협상 당시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하려는 것은 선진금융 기법을 배우자는 면도 있지만 월스트리트가 가지고 있는 금융 노하우와 방대한 정보가 보물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특히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민영화시켜 세계적 IB로 만든다는 비전을 세운 입장에서 리먼브러더스는 잘만 하면 뚜렷한 업적까지 남길 수 있는 ‘대어’였다. 산업은행은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추진하면서 인수에 성공할 경우 서울에 아시아태평양 본부를 설치, 동북아 금융중심지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을 짜놓았다.
또 해외에 산업은행과 연계한 10∼15개의 코리아 데스크를 설치해 IB채널을 확보하는 한편 리먼브러더스 우수 인력의 이탈 방지를 위해 스톡어워드(Stock Awards·주식으로 지급되는 상여금)를 부여한다는 방안을 마련했었다. 한 금융사 고위 간부는 “민 행장이 공격적인 투자를 선호하는 IB 출신이라는 점과 이명박 정부의 아시아금융허브 추진이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부채질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민 행장의 열띤 구애에도 리먼브러더스 인수가 무산된 까닭은 뭘까. 리먼브러더스 인수가 무산된 무대 뒤에는 미국과 한국 정부가 들어 앉아 있다는 것이 금융가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큰 IB 인수 협상이 진행되는데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의 부실을 몰랐을 리 없다. 수차례 실사를 거친 만큼 리먼브러더스의 숨겨진 부실도 파악했을 것”이라며 “문제는 미국 정부였다고 봐야 한다. 이런 협상에서 대개 인수하려는 기업은 풋백옵션(추가부실을 정부가 떠맡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상식이다. 미국 정부가 산업은행의 풋백옵션 요구를 거부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업계 인사도 “리먼브러더스 인수 무산은 무엇보다도 금융시스템을 지키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결정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기관투자 위주로 된 리먼브러더스의 부실을 안는 풋백옵션을 허락할 경우 미국의 금융시스템 자체가 붕괴될 수 있었다”면서 “우리 정부가 외환위기 당시 제일은행을 풋백옵션으로 넘겼다가 추가 부실을 안은 것은 대표적인 후진적 금융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 경제팀이 지금까지 보여준 ‘특유의 엇박자’도 아이로니컬하게 리먼브러더스 인수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하에서 청와대와 한국은행, 재정경제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은 경제정책에서 수차례 의견 충돌을 보여 왔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 행장은 인수에 몸이 달았지만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여러 차례 인수 자제 의사를 밝혔다. ‘이인삼각’을 이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긋난 모습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엇박자를 가라앉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했을 것이 자명한 청와대는 개입 보도를 부인하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이러한 청와대의 행보에 대해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업은행은 민영화를 준비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아시아 금융시장 허브를 목표로 글로벌 IB를 추진해왔다. 문제는 세계 5대 IB 중 3개가 이미 무너졌고 민 행장의 헛발질도 IB 추진과정에서 나왔다는 것”이라며 “현재 이명박 정부가 IB를 준거모델로 삼아 마련한 금융정책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변한 상황이다. 그런데 청와대 개입을 인정할 경우 ‘최악의 사태를 막았다’는 칭찬은 잠시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경제정책에 대한 참모진의 엇박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산업은행 민영화가 준비돼 있지 않다는 역공마저 받을 수 있는 만큼 청와대로서는 부인할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라고 분석했다.
이의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