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발 금융 위기가 지구촌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다. 사진은 월가에 있는 뉴욕증권거래소. | ||
“어머니가 주시는 용돈을 모아 매주 한 번씩 은행에 들러 입금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은행에 갔지만 그때까지 저축했던 9달러 75센트를 출금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엄마는 제게 ‘얘야, 은행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서 네 돈을 찾을 수 없게 됐단다’고만 말씀해주셨죠. 당시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바로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었답니다.”
최근 미국 NBC가 방영한 엠마 라인버거라는 할머니의 생생한 ‘학창시절 체험담’이다. 요즘 미국 현지 언론들은 ‘과연 대공황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보도를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다. 그럼에도 각국 지도자들은 “현재의 금융시스템과 정부의 대처능력을 감안하면 과거와 같은 대공황이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반면 시민들은 이미 대공황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불안감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경제위기의 여파가 이미 실생활 곳곳에 파고 들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최근 캘리포니아 지역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는 시민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신경정신과병원장은 “지난 8월 동안 외래환자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네 배나 늘어났다. 환자 중 대략 60%는 자신의 질병이 최근의 경제난과 관련 있다고 밝히고 있다”고 전했다. 주택 대출금을 갚지 못해 은행에 차압을 당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기업들이 대규모 감원을 발표하는가 하면 보유 중인 주식이 세 토막 네 토막 나는 현실 앞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얘기다.
시민들은 최근 들어서야 ‘대공황의 그림자’를 보며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이미 경제전문가들은 진작부터 미국이 신용불량 상태를 거쳐 파국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경고음을 내왔다. 미국 최고의 금융전문가로 꼽히는 찰스 모리스 변호사는 새 책 <미국은 왜 신용불량 국가가 되었을까>에서 “대차대조표에 현란하게 포장된 터무니없는 자산가치 평가, 엉터리 신용평가, 은닉 부채를 일소해야 한다”며 “미국은 1980년대 자산 붕괴를 겪은 일본처럼 사태를 자꾸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식으로 가다가는 오직 파멸만이 있을 뿐”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경제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최근 “구제금융안이 모든 것을 구제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금융기관이 정상회복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경제적 고통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임을 시사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대공황이 올 가능성은 매우 적다”는 게 공식적인 입장이지만 내년도 지구촌 전체 경제성장률은 3%에 머물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는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이 일시에 붕괴된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대공황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문제의 근원인 미국 주택가격 하락세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한다. 지난 2005년 이후 미국 주택가격이 계속 하락하면서 대출을 갚지 못한 보유자들이 집 소유권을 은행에 넘기고, 사실상 헐값에 가까운 주택을 넘겨받은 은행 역시 수많은 파생상품을 양산하며 위험을 ‘헤지’(회피)하려 했지만 결국 부실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은행들은 일반 기업이나 시민들에게 대출을 하지 못하면서 경기 전반에 걸쳐 유동성이 악화됐다.
이런 현상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경기가 침체되다보니 풍부한 자원을 내다팔며 경제부흥을 이끌어왔던 러시아 브라질 등 신흥 경제권에도 악영향이 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을 멈추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주택가격이 오르면 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닷컴 붕괴 이후 경기침체를 우려한 미국 정부가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 기조를 유지, 시장에 돈이 넘쳐나면서 주택 가격이 비정상적이리만치 폭등했기에 하락 폭도 그만큼 큰 것이다.
지구촌이 G20(선진서방 8개국+12개 신흥경제국)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를 여는 등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경기 정상화에 최소 3∼5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부동산 등 기초 자산에 대한 거품이 아직 완전히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촌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대공황의 위협 속에 긴장의 나날을 보낼 위기에 처한 셈이다.
이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