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안이 발표됐지만 지배구조 논란에 시달려온 삼성이 지주사제로 전환되기는 어렵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사진은 태평로에 있는 삼성본관 로비. | ||
이번 개정안 발표로 ‘삼성은행’ 탄생 논란 못지않게 삼성의 지배구조 변화 여부가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금산 분리 규제로 인해 지배구조 논란에 시달려온 삼성그룹 입장에선 정부의 관련법 완화 행보가 반가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이 정치권과 학계 시민단체 등에서 삼성에 줄기차게 요구해온 순환출자구조 해소와 지주사제 전환을 이끌어내진 못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삼성이 현재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건희 전 회장 일가는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를 통해 삼성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인 삼성에버랜드는 이 전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25.10% 지분을 보유, 최대주주로 있으며 3.72%를 가진 이 전 회장을 비롯해 딸들인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와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가 각각 8.37%씩 지닌 대주주로 참여 중이다.
이러한 지배구조를 흔들 변수는 삼성생명 상장이다. 지난 1999년 삼성자동차 법정관리 발표 직후 이건희 전 회장은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주당 70만 원 가치로 산정해 삼성자동차 채권단에 담보로 넘긴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삼성생명 상장작업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지난 2005년 채권단이 5조 원 환수소송을 제기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삼성생명이 상장되면 삼성에버랜드가 지닌 자산 중 금융계열사 주식가치가 절반을 넘게 돼 에버랜드의 금융지주사 지정을 피할 수 없다. 지주사 체제로 전환되면 일단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야 하므로 삼성카드가 보유한 삼성에버랜드 지분 25.64%의 처분이 불가피하다. 총수 일가가 에버랜드 지분구조를 장악하고 있는 만큼 삼성카드의 지분 매각이 지배구조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없다. 삼성은 지난 4월 22일 이건희 전 회장 퇴진을 골자로 발표된 쇄신안을 통해 이미 삼성카드의 에버랜드 지분 처분을 통한 순환출자 해소를 예고하기도 했다.
문제는 삼성전자 지분 7.21%를 보유한 삼성생명의 지배력 존속 여부다. 이번 법 개정 예고에 따라 보험·증권 등 금융지주사는 일반 자회사를 둘 수 있게 됐지만 보험자회사가 일반 손자회사를 두는 것은 금지됐다. 지주회사제하에선 ‘삼성에버랜드(지주사)→삼성생명(자회사)→삼성전자(손자회사)’로 이어지는 지배구조 유지가 불가능한 셈이다.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전자를 자회사로 두려면 삼성전자 지분 1% 확보하는 데 1조 원 가까운 돈이 들어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해진다. 내심 ‘보험 자회사 밑에 일반 손자회사 허용’을 기대했을 삼성이 이런 부담을 감수하며 지주사제 전환을 서두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번 정부의 법 손질은 삼성의 지배구조 유지에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삼성이 희망을 갖게 했다’는 평가를 낳기엔 충분하다. 현 정부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주장해온 금산분리 완화 정책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까닭에서다.
재계에선 이번 조치가 삼성이 기대해온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으로 가는 단계로 보기도 한다. 삼성으로서는 ‘금융회사가 비금융 계열사 주식 5% 초과 보유할 수 없다’는 금산법 제24조 때문에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7.21% 중 2.21% 매각해야 한다는 점이 골칫거리였다. 이번 지주사 요건 개정을 통해 금산분리 완화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금산법 24조 수정 문제가 여권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 논의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재계 인사들은 삼성이 이번 법 개정을 토대로 지주사제 전환 방법을 연구하기보다는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금산법 개정 등 금산분리 규정 완화를 위한 설득·홍보작업에 나설 것으로 전망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삼성전자가 달러 매각에 나선 점을 눈여겨 볼 만하다. 원-달러 환율 폭등으로 정부가 기업 보유 외환 매각을 종용한 가운데 10월 들어 삼성전자가 수억 달러를 시장에서 원화로 환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10억 달러 매각설’까지 나돌았지만 삼성은 이를 부인한 상태다.
삼성전자의 사업적 측면에서만 보면 지금은 달러를 내놓기보다는 끌어 모아야 할 때다. 삼성전자는 미국 샌디스크를 상대로 58억 5000만 달러의 초대형 인수·합병을 제안해놓은 상태다. 샌디스크 인수대금을 현금으로 치르겠다고 했으니 한 푼의 달러가 아쉬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환율이 높을 때 거액의 달러를 원화로 바꾸는 모습을 두고 정부에 대한 구애의 제스처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환율상승 국면에서 삼성이 사업을 위해 달러를 끌어 모으는 것에 정부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이는 결국 삼성의 달러 대방출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관가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한편 개정안에 따라 증권 자회사가 일반 손자회사를 보유할 수 있게 된 점은 향후 삼성증권의 활용도를 높여줄 전망이다. 삼성증권은 현재 호텔신라(3.06%) 에스원(1.32%) 삼성테크윈(1.95%)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내년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시행으로 증권사의 지급결제기능이 가능해짐에 따라 삼성증권이 몸집을 불리고 계열사 지분을 추가 확보하며 지배구조의 새로운 축으로 떠오르게 될지 관심사다.
개정안에 따라 산업자본의 은행주식 보유한도가 현행 4%에서 10%로 확대되면서 한동안 정·관·재계를 달궜던 ‘삼성은행’ 탄생 가능성도 엿보이지만 삼성은 지난 4월 22일 쇄신안 발표 당시 “은행업 진출은 안 한다”고 공언한 바 있다. 재계에선 자통법 시대를 맞이하는 삼성의 속내에 ‘삼성증권을 은행급 기관으로 키우겠다’는 복안이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