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는 남중수 전 KT 사장. | ||
검찰의 KTF 납품비리 수사는 ‘속전속결’이었다. 지난 9월 3일 KTF 협력업체 사무실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18일 납품비리와 관련한 협력업체 대표 전 아무개 씨(구속)의 체포, 19일 KTF 압수수색과 조영주 전 사장(구속) 체포에 이르기까지 2주가량이 걸렸을 뿐이다.
KTF 수사 불똥이 KT와 남중수 전 사장에게 튀기까지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 전 사장 혐의가 남 전 사장이 KTF 사장으로 재직했던 시기에 맞춰져 있는 까닭에 KTF의 모태인 KT와 남 전 사장에 대한 전 방위적 수사 가능성이 KTF 수사 초기부터 거론됐다. 9월 22일 조 전 사장 구속에 이어 9월 말 남 전 사장이 출국금지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고 10월 초엔 노무현 정부 실세 인사 친인척 연루설까지 불거지는 등 남 전 사장과 KT를 둘러싼 ‘군불 지피기’가 계속됐다. 목 디스크 수술로 2주일간 입원했던 남중수 전 KT 사장이 현업에 복귀한 직후인 10월 16일,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KT 사옥과 남 전 사장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고 결국 남 전 사장마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검찰 안팎에 따르면 KTF 수사 초기부터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 소속 수사인력 대부분은 KTF와 KT 그리고 남 전 사장 등 임직원들에 대한 조사에 투입돼 왔다고 한다. 이 같은 수사당국의 총력전은 최근 정부당국이 기업들에 대해 취하고 있는 유화적 자세와 대조를 이룬다. 9월 말 전직 CJ그룹 재무팀장 살인청부 사건 공개로 촉발된 이재현 회장의 차명계좌 의혹은 삼성 비자금 파문만큼의 회오리를 몰고 올 것으로 보였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국세청이 차명계좌 관련 대대적 조사에 들어갈 것이란 초반 관측은 무색해진 상태다. 재벌가 2·3세들 주가조작 사건 또한 이미 구속된 구본호 박중원 씨 외 재벌가에서 추가 사법처리 대상자가 나올 가능성은 낮은 상태.
KTF의 마케팅 비용 집행내역과 관련해 대기업 계열의 한 광고대행사가 압수수색을 받을 것이란 관측이 검찰 주변에서 한동안 나돌다가 수그러들기도 했다. 최근 워크아웃설까지 불거진 한 기업집단은 M&A 과정 구설수로 당초 검찰이 본격 수사대상으로 삼았다가 접은 것으로 알려진다. 안 그래도 위태위태한 기업인지라 검찰의 칼날이 해당 기업을 더 큰 위기로 내몰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고 한다. 이는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와 관련해 기업수사 자제를 천명한 정부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임채진 검찰총장이 기업 압수수색 자제 방침을 밝히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임 총장은 최근 일선 지방검찰청들에 제시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검찰권 행사 방향’을 통해 “기업 신용을 훼손하는 악성 루머나 사설 정보지를 집중 단속하라”, “기업 관련 수사에서 압수수색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유의하라”는 등의 지시를 내렸다. 과도한 압수수색이 기업 활동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재계의 주장을 감안한 것이다.
▲ 삼성 출신으로 차기 KT 사장으로 하마평에 오른 윤종용 고문(왼쪽), 이기태 부회장. 연합뉴스 | ||
남 전 사장 수사가 급물살을 타면서 정부부처 안팎에선 후임 KT 사장 후보 10여 명에 대한 하마평이 벌써부터 오르내리고 있다. 민영화됐지만 KT가 정치 외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식 때문인지 대부분 이명박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인사들이다.
그런데 이 후임 후보군에 지승림 알티캐스트 사장과 윤종용 삼성전자 고문, 이기태 삼성전자 부회장 같은 ‘삼성맨’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지승림 사장은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구조본) 기획홍보팀장(부사장) 출신으로 지난해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정보기술(IT) 담당 특보를 거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미디어홍보분과 간사를 지냈다.
지난 5월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직에서 물러난 윤종용 고문은 2006년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의 외부영입 희망 리스트 맨 윗자리에 올랐을 만큼 현 여권에서 탐내온 인물이다. 삼성전자 사장을 지낸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도 후보군에 거론됐지만 남 전 사장으로부터 진 전 장관 측근이 불법자금을 받은 의혹이 알려지면서 향후 거취가 불투명해진 상태. 노무현 정부 관료 출신인 그는 지난 대선 막판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화제에 올랐다.
이들은 ‘한국 IT신화 주역’ 이기태 부회장과 더불어 정부가 핵심사업으로 선정한 와이브로를 추진할 적임자로 평가받는다. 아직은 설에 불과한 후임자 하마평인데다 물망에 오르는 후보만도 10여 명에 이르지만 그 중 삼성맨들이 제법 많이 거론되는 것이 정부와 삼성 간의 물밑 공감대 형성 단계로 비치기도 한다.
현 정부 초기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을 지낸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경제위기 극복과 관련해 ‘삼성 역할론’을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곽 교수는 지난 2일자 <매일경제> 인터뷰를 통해 “대기업 총수들이 나서 한국경제 문제없다고 홍보를 좀 해야 한다”며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삼성이 나서줬으면 좋겠다. 삼성이 한국 경제에 대해 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밝혔다. 이후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던 전직 청와대 수석의 발언이 청와대 내부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 풀이하는 시선이 생겨난 것이다. 혹시 정부는 한국경제의 위기에 삼성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듯 KT의 위기에도 삼성맨의 활약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