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이 나빠 난리인데 뭐 하나 딱히 정해진 것이 없어 요즘 올 스톱 상태로 금융당국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최근 만난 한 대형 금융지주 관계자의 말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두 달이 지났지만 금융권은 아직 구체적인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기준금리를 놓고 정부와 한국은행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데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의 고위직 인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은행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KB금융, 우리금융 등 차기 회장 선임을 앞두고 있는 대형 금융지주의 발걸음은 더 무거울 수밖에 없다. 회장이 정해져야 임원 인사도 단행될 테고 구체적인 사업계획도 수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26일 열린 KB금융 정기이사회에서는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 관련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오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KB금융의 회추위 논의는 빨라야 5월에나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팔성 회장이 사의를 표명한 우리금융 역시 지난 4월 23일 정기이사회에서 회추위를 구성할 것으로 보였으나 돌연 연기됐다.
이는 정부 쪽에서 회장후보 선임 작업을 서두르지 말라는 뜻을 우리금융과 예금보험공사 측에 전달한 탓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관계자는 “현직 회장이 이미 사의를 표명한 가운데 차기 회장 인선이 늦어져 우리금융의 행동반경이 더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론을 의식했는지 우리금융은 지난 26일 열린 이사회에서 회추위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이 오가면서 뒤늦게 회추위원 구성을 서둘렀다.
가뜩이나 차기 회장 인선과 관련해 몇몇 인물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KB금융과 우리금융 모두 사업 구상과 진행에 혼선이 빚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이들 금융지주의 차기 회장 선임과 관련해서는 정부 입김이 작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다. 금융권의 또 다른 관계자는 “설사 회추위가 구성되고 회장 선임을 서두른다 해도 회추위원들이 정말 심사숙고해서 결정할지는 의문”이라며 “금융권 특성상 정부 의견이 회추위 의견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문제는 지난 1분기 금융지주들의 실적이 전년 동기 대비 급감한 것으로 나타난 가운데 금융권 인사까지 늦어진다는 점이다. 자칫 경영 공백과 관리·감독 미비 상태가 초래돼 금융권이 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질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지난 4월 26일 발표한 KB금융과 하나금융의 실적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KB금융의 지난 1분기 당기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32% 감소한 4115억 원을 기록했다. 하나금융은 무려 76.8% 감소한 313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우리금융은 전년 동기 대비 41% 감소한 4200억 원 수준, 신한금융은 33% 감소한 5800억 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실제 실적은 이보다 더 좋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지난 4월 11일 한국은행이 정부 압박에도 기준금리를 동결(2.75%)해 금융권의 전망도 밝지만은 않은 상태다.
일부 금융지주는 실적 부진 때문에 곤욕을 치를 판이다. 자산건전성 악화에다 실적 부진까지 더해진 신한금융지주는 최근 3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신한지주는 올해 회사채 발행으로 1조 6000억 원가량을 조달할 계획을 갖고 있다. 실적 부진에 빠진 우리금융은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의 ‘임금 동결·삭감’ 같은 징계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금융지주사들의 ‘어닝쇼크’ 여파가 크게 번지고 있는 셈이다.
올 한 해 내내 금융사의 실적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금융권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경기 침체와 불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금융권 스스로 뾰족한 수를 내기도 힘든 상황이다. 금융권에서는 “그나마 조직과 시스템이라도 안정된다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