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동화은행(주) 청약을 위해 몰린 투자자들. | ||
우리나라 증권거래소의 기원은 1932년 미곡시장 투기방지를 명목으로 내세워 일본인들이 세운 ‘조선취인소’다. 이름은 조선취인소지만 당시 거래되던 284개 종목 중 일본 주식이 201개일 정도로 증권 발행과 유통은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됐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판을 치고 있었지만 당시 최고의 수익률을 올린 주식왕은 사보이호텔을 세운 조준호 씨(1903~1967)였다.
도쿄 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한 조 씨는 1934년 동아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며 증권업계에 뛰어들었다. 1938년 7월 주요 주식이 폭락하고 있을 때 쏟아지던 매물을 모두 사들이는 과감한 투자로 이후 급등장에서 엄청난 차익을 챙겼다. 논 한 마지기 200평에 50원 하던 시대에 조 씨가 벌어들인 액수는 자그마치 300만 원(현재가치 3000억 원)에 달했다. 조 씨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밑천으로 미두(현물 없이 쌀을 팔고 사는 일)사업 등을 벌여 더 큰 부를 쌓았고 이 돈으로 한국인 자본으로 세워진 최초 호텔 사보이호텔을 설립했다.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조선취인소가 미군정에 의해 1946년 1월 폐쇄된 뒤 다시 문을 연 것은 무려 10년의 세월이 흐른 1956년 3월의 일이었다. 조선취인소 폐쇄 이후 거리로 나앉은 증권업계 종사자들은명동 근처를 배회했다. 이들의 아지트는 오양빌딩이었다. 이들은 여기 모여 증권거래소를 다시 여는 꿈을 꿨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취인소를 통해 미두시장을 장악하고 쌀을 수탈했던 상처가 컸다. 당시 언론은 증권시장을 ‘허가받은 도박장’이라고 비난하며 “정부가 합법적으로 도박을 장려하려 든다”고 강하게 반대할 정도였다. 대한증권 등 증권회사가 잇달아 세워지면서 증권거래소 설립 필요성이 높아졌지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화약보관소로 사용됐던 조선취인소가 화약폭발로 뼈대만 남아 있어 진전이 없었다. 이후 수리비 조달을 위해 증권금융회사를 설립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56년 3월 3일 최초의 매매거래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렇게 문을 연 주식시장은 요즘도 그렇지만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최근 주식시장은 재벌가 자제들의 주가조작 사건으로 떠들썩하지만 과거 증시를 발칵 뒤집어놨던 사건은 주가조작은 명함도 못 내밀 만한 가짜 주식(주권 위조) 매매 사건이었다.
1975년 1월 한 중년 남성이 모 증권사를 찾아와 해태제과공업주식회사 주식 100주권 145매를 1주당 1370원에 매도하고 1억 5000만 원을 받아갔다. 그런데 이 주식이 가짜 주식이었던 것. 이로 인해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증권사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했다.
아예 경영진이 나서 주식을 불법으로 발행하거나 위조 주권을 매매한 사건이 발생했다. 신진자동차판매주식회사와 한독맥주주식회사 사건이 그것이다. 이인식 신진자동차판매주식회사 사장과 김남욱 총무부장, 증권브로커 윤응상은 1975년 5월 회사의 예비주권(분실 등에 대비해 예비해 놓은 주식)을 불법으로 발행했다. 윤응상은 하수인들을 시켜 증권사 객장을 돌아다니며 “신진자동차 주식이 좋다는데 사라”고 떠들게 한 뒤 주가가 급등하면 주식을 팔았다.
▲ 1956년 3월 대한증권거래소 개소식(위), 1989년 주가 1000포인트 돌파 기념 자축연 | ||
한독맥주주식회사 주권 위조 사건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1972년 세워진 한독맥주는 당시 OB맥주와 크라운맥주라는 양대 아성에 가로막혀 판매가 신통치 않았다. 이로 인해 회사가 기울자 이준석 한독맥주 사장은 1976년 회사 간부들과 공모해 회사주권 393만 주를 위조 발행한 뒤 이를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20억 원을 대출받은 것이다. 이런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당시 증권시장의 공신력은 땅에 떨어졌다.
증권시장 역사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공모주 열풍이다. 요즘에도 장세가 좋을 때는 경쟁률이 수백 대 1을 넘지만 1970년대는 거의 광풍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액면가 공모였기 때문에 주식을 배정받기만 하면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런 탓에 “사면 무조건 남는다. 살 수만 있다면 사채를 빌려서라도 사야 한다”며 시골 아낙네들까지 장롱 속에 숨겨둔 현금을 들고 주식을 사기 위해 상경했다. 1976년 3월 한국비료 공모에는 6만 2000여 명의 청약자가 밀려드는 바람에 증권사 직원들이 명단을 정리하는 데만 며칠 낮밤을 매달려야 했다. 이런 광풍 속에 선착순 배정을 받기 위해 새벽 2시부터 증권사 정문에서 담요를 깔고 밤을 지새우는 투자자들도 생겨났다. 경찰들이 통행금지 위반 단속을 하자 이번에는 증권사 근처에 숨어 있다가 통금이 해제되는 4시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바람에 공모주 청약 때 증권사 주변은 매일 아수라장이었다.
정부가 지나친 열풍을 우려해 1인당 50주로 공모주 배정을 제한하자 이번에는 청약브로커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이들은 청약 전날 증권사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당일 줄을 서서 청약표를 받았다. 이렇게 받은 청약표를 거액 투자자들에게 넘겨 이득을 챙겼다. 투자자들도 청약표 싹쓸이를 통해 적지 않은 이익을 봤다. 이러한 공모주 열풍은 1977년 건설주 파동으로 주가 대폭락이 발생하면서 사라졌다.
잊혀져가던 공모주 열풍은 벤처열풍을 타고 2000년대 초반 다시 부활했다. 청약계좌를 수십 개씩 만들어 증권사를 돌아다니는 아줌마 부대도 등장했었다. 이런 열풍에 힘입어 2003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디지털대성의 공모 당시 무려 2908 대 1이라는 사상최고 경쟁률을 기록했다.
요즘도 증권가의 정보는 발 빠르기로 유명하다. ‘정보에 사서 뉴스에 팔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증권가 정보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최초의 사례는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해방 직전으로 돌아간다. 1945년 8월 미국의 잇단 원폭 투하에도 일제는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취인소는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기 이틀 전인 1945년 8월 13일 문을 닫았다. 일제가 발악하는 모습과 달리 항복을 선언할 것이라는 정보를 발 빠르게 입수하고 거래를 중단한 것이다.
이의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