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도 있는 농협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친정부 성향으로 바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최원병 회장. | ||
“농협이 돈을 벌어 사고나 치고 있다.”
지난 4일 이명박 대통령이 가락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농협을 향해 쏟아낸 질책 중 하나다. 이 ‘가락시장 발언’으로 지지부진하던 농협의 개혁 작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사실 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농협 개혁을 추진해 회장의 대표이사 추천권 인사추천위원회 이양, 회장 임기 1회 연임으로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농협법 개정안을 마련했었다. 하지만 이 개혁안은 입법예고까지 마치고도 농협과 정치권의 반대로 백지화됐다.
이 때문에 농민단체 등에서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역시 공룡” 등과 같은 비아냥거림이 나오기도 했다. 전에도 항상 시작은 떠들썩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별다른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증권 인수 및 자회사였던 휴켐스의 매각 과정에서 농협을 둘러싼 논란들이 확산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농협 안팎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최고조에 이른 것이다. 농협의 한 내부인사는 “지역 조합장들을 통해 들리는 민심이 너무 좋지 않아 내부에서조차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 힘든 것 아니냐’라는 우려가 나왔다”고 귀띔했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농협을 비난하며 대대적인 농협 개혁을 예고했다. 이 대통령의 농협 발언 다음날 여당인 한나라당도 공식 성명을 통해 ‘농협의 구조조정이 즉각 시작돼야 한다’며 힘을 실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역시 특별했던 것일까. 농협은 대통령의 발언 후 긴급회의를 갖고 불과 6시간 만에 ‘신용부문의 지주회사 분리’라는 개혁안을 내놓는 신속함을 보였고 다음날엔 임원 24명이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당장 ‘알맹이는 없고 재탕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로 꼽혔던 회장의 권한 축소가 빠졌고 15년 전부터 나온 신용부문 분리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농협 안팎에서는 모든 권한이 회장에게 집중돼 있는 지금의 지배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농협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힘들다는 주장이 지배적인 상황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한 관계자는 “농협이 비리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것은 전임 회장들이 모두 구속됐기 때문이다. 이는 회장 개인 잘못도 있지만 구조적인 문제가 더 크다”고 말했다.
비판이 커지자 최원병 농협중앙회 회장은 지난 8일 농협 대강당에서 열린 12월 정례조회에서 “회장 스스로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면 회장부터 개혁하겠다”며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같은 날 정부도 “농협을 둘러싼 최근의 각종 불미스러운 사태와 급변하는 대내외 경제환경 변화를 감안해 보다 근본적인 농협 개혁을 조속히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지난 8일 농협, 농민단체, 학계 인사로 이뤄진 ‘농협개혁위원회’(농개위)를 출범시켰다. 농개위에서는 주로 지배구조 문제가 집중 논의될 것이라고 전해졌다. 정부는 농개위에서 마련한 개혁안을 토대로 농협법 개정안을 만들어 내년 2월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처럼 농협과 정부가 한목소리를 내면서 일단 개혁 작업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농협 안팎에서는 또 다른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자칫 농협이 현 정권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전국농협노조(위원장 서필상)의 한 관계자는 “벌써부터 현 정부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주요 자리에 임명될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다”며 “농민들의 요구는 무시한 채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개혁이 진행될 경우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농협에 대해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는 듯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한쪽에서 농협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6000억 원 상당의 예산을 관리하는 제주도 교육금고를 맡기거나 1조 원 대의 농기계 임대사업을 담당케할 안을 발표했다. 이는 개혁 과정에서 나올 수도 있는 지역농협의 반발을 의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관련, 최원병 회장이 지난 11월 말 청와대를 비밀리에 방문한 것으로 전해져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최 회장이 비공식적으로 청와대에 찾아와 이명박 대통령과 얘기를 나누고 갔다. 정확히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세종증권 인수 의혹과 맞물려 농협의 개혁 방안이 논의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최 회장이 그동안 친정체제 구축을 위해 힘써왔다는 것은 농협 안팎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하지만 전 회장인 ‘정대근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맥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최 회장이 자신의 고등학교 선배인 이 대통령에게 지원사격을 요청했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최 회장이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게도 도움을 구했다는 소문도 있다. 경주 안강농협 조합장 시절 경상북도의회 의장을 지낸 바 있는 최 회장은 포항이 지역구인 이 의원과 친분이 돈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이러한 말들이 사실일 경우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강도 높은 농협 비난도 ‘삐딱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최 회장으로서는 회장 권한을 일부 내주더라도 개혁에 박차를 가해 농협에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전략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 전 회장의 비리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어 최 회장은 인력개편에 대한 명분도 얻게 됐다. 농개위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핵심으로 떠오른 지배구조 문제에 초점이 쏠려 있는 사이 회장은 쉽게 조직을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관례를 봤을 때 회장 권한 축소는 농개위에서 합의를 이루기도 어렵지만 국회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이번 개혁 작업의 최고 수혜자는 최 회장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