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기아자동차의 수시인사 단행으로 정의선 사장의 총수직 입성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진은 정몽구 회장(왼쪽)과 정의선 사장 합성 모습. | ||
이번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김익환 전 부회장은 이미 3년 전 인사에서 ‘물먹었던’ 전례가 있다. 그는 지난 2005년 초 정의선 사장과 거의 동시에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직에 올랐다. 무난한 성품에 홍보맨 출신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롱런이 예상됐지만 그해 12월 고문직으로 밀려났다. 당시 그룹에선 “문책성 인사가 아닌 분위기 쇄신 차원”이라 설명했지만 매끄럽지 못했던 노사관계와 실적부진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됐다.
그러던 김익환 전 부회장은 2007년 10월 부회장으로 승진하더니 이듬해인 2008년 3월 정의선 사장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자 새로 대표이사진에 합류했다. 이번 인사를 접한 재계 인사들은 “한 번 밀려났던 김익환 전 부회장이 기아차에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컴백한 명분은 실적저조 논란으로 정의선 사장이 대표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기아차 위기를 잘 수습해달라는 의미였던 셈”이라 평한다.
김 전 부회장이 3년 전 사장직에서 경질될 당시 그 자리를 메운 인사는 바로 조남홍 전 사장이었다. 2005년 12월 대표이사 사장 발탁 이후 국내영업과 노무담당 업무를 주로 담당하면서 적자에 허덕이던 기아차의 실적 개선을 이뤄내 호평을 받았지만 그도 결국 지난 연말 인사에서 고문직으로 물러앉게 됐다.
김익환-조남홍 두 대표이사 경질인사 직후인 26일 현대·기아차그룹은 2009년 정기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정성은 기아차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 김 전 부회장 보직을 물려받을 전망이며 조 전 사장 자리엔 서영종 현대파워텍 사장이 임명됐다. 재계에선 이번 인사를 세대교체와 더불어 정의선 사장 재도약 발판을 마련하려는 성격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정 사장의 대표직 반납 이후 괄목할 만한 판매실적 약진을 이뤄내며 기아차 조직을 추슬러온 김익환-조남홍 두 사람을 밀어내고 정 사장이 영향력을 넓혀가는 수순이 예상되고 있다.
재계 일각에선 ‘대관식’ 전초 행보 차원에서 정 사장이 현대차로 수평 이동할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반면 노신급 수장들이 뒷전으로 물러난 데다 애물단지에서 알짜 계열사로 변모해가는 기아차에서 정 사장 운신의 폭을 넓혀주려 할 것이란 관측도 힘을 얻어간다. 당초 부회장 승진설까지 나돌았던 정 사장은 이번 승진인사에서 제외됐지만 기아차 3인 대표이사 중 두 사람이 옷을 벗게 된 이상 조만간 있을 보직변경 인사를 통해 대표이사 직함을 다시 거머쥘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 김익환 전 부회장(왼쪽), 조남홍 전 사장(오른쪽) | ||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제철→현대차’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에서 이 중 한 곳의 최대주주만 돼도 정 사장은 차기 총수직에 오를 인프라를 갖추게 된다. 지배구조 근간을 이루는 핵심 계열사들 중 주가가 가장 낮은 곳은 기아차(12월 24일 현재 6450원)다. 10월 초까지만 해도 1만 원을 훌쩍 넘던 기아차 주가는 글로벌 금융위기 유탄을 맞고 반 토막 나있는 상태다.
재계에선 정 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물류 계열사 글로비스 주식을 팔아서 기아차 지분을 확보할 가능성이 오랫동안 거론돼 왔다. 정 사장의 글로비스 지분율은 31.88%(1195만 4460주). 12월 24일 현재 글로비스 주가는 4만 2800원이다. 정몽구 회장의 글로비스 지분율이 25.66%이므로 정 사장 지분 전량 매각이 경영권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볼 때 정 사장은 이를 통해 적어도 기아차의 두 자릿수 지분율 확보를 도모할 수 있다. ‘대주주의 책임경영을 위한 지분 참여’ 목적을 내세워 정 사장이 대표이사로 컴백하는 동시에 기아차 지분을 대량 확보하는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도 있다.
승계구도와 관련, 최근 계열사 현대커머셜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보유하고 있던 현대카드 지분 5.5%를 인수하게 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12월 23일 캠코는 현대카드 지분 5.5%(888만 9622주) 매각 입찰에서 현대커머셜을 최종 낙찰자로 결정하고 지분 양수도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현대·기아차그룹은 현대카드 지분율을 종전 48.99%에서 54.49%까지 올려놓게 됐다.
현대커머셜에선 현대차가 지분율 50%로 최대주주에 올라있으며, 현대모비스가 2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30%는 정 회장 차녀 명이 씨(20%)와 남편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10%)의 몫이다. 계열사인 기아차와 위아가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지난 3월 정태영-정명이 부부에게 주당 5336원에 매각한 결과다. 이는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을 업계 1위로 끌어올리면서 정의선 사장과 곧잘 비교대상에 오르내렸던 정태영 사장에 대한 분가 포석으로 비치기도 했다.
따라서 최근 현대커머셜이 현대카드 지분율을 높이며 몸집 불리기에 나선 것 역시 분가 관측을 더욱 달굴 태세다. 잘나가는 사위에 대한 계열분리설은 자연스레 ‘황태자’ 정의선 사장 후계체제 가속화 전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최근까지 그룹 안팎에선 정태영 사장을 그룹 중앙무대로 끌어들여 정 사장 승계구도의 초석을 닦는 첨병 역할을 맡길 것이란 관측이 있기도 했다.
한편 이번 기아차 인사 배경을 후계구도 확립 차원보다는 기아차에 대한 정몽구 회장의 친정체제 의지 표출이라 보는 시선도 있다. 몇몇 재계 인사들은 “정몽구 회장의 ‘수시인사’는 표현 그대로 시기와 성격을 종잡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아들의 대관식을 앞당기기 위한 아버지의 결단인지, 혹은 다른 목적이 깔려있는 것인지, 그룹의 운전대를 쥐고 있는 정몽구 회장 이외에는 누구도 속 시원히 답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