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4대 그룹 오너 3세들인 이들에게 최근 공통점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관심 사업’이다. 자동차의 전자제품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이들 모두 최근 자동차 전자장치(전장·電裝) 사업을 자신들의 ‘즐겨찾기’ 목록 맨 윗줄에 올리고 있다. ‘스마트 카’의 핵심인 전장 사업이 소위 국내 대표 재벌 오너 3세들의 관심 사업으로 떠오르며 전장(戰場)이 되고 있는 것이다.
LG전자는 최근 공시를 통해 그룹의 IT(정보기술) 서비스 기업 LG CNS의 자회사인 자동차 설계 업체 브이이엔에스(V-ENS)를 합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LG전자는 지난 1일자로 LG CNS로부터 브이이엔에스 주식 100%를 170억 원에 인수하고, 오는 7월 1일자로 합병을 완료할 계획이다. 합병 배경에 대해 LG전자 측은 “자동차 관련 엔지니어링과 부품 설계 등에 강점이 있는 브이이엔에스와 시너지 제고 및 경쟁력 강화를 통해 사업가치를 증대하고 LG전자의 자동차 부품 사업 영역에서의 성장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재계 일각에서는 죽어가던 휴대폰 사업을 살리며 자신감이 배가된 구 부회장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회심의 카드를 커내 들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자동차 부품사업을 그룹의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키울 것 같으면 지주사인 (주)LG가 이 회사를 인수했을 것”이라며 “LG전자가 브이이엔에스를 인수한 것은 공대 출신인 구 부회장의 의중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그룹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LG CNS보다는 투자 여력이 있는 LG전자 밑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라며 “LG전자를 컨트롤 타워로 삼아 관련 사업의 수직 계열화를 앞당김으로써 이 시장에서 앞서나가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미 LG는 그룹 차원에서 전기차 부품 사업을 적극 확대하며 이 사업을 키우고 있다. 전기차 사업을 영위하는 계열사는 LG전자를 비롯해, LG화학, LG이노텍, LG CNS, 에버온 등이다.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에선 LG화학이 글로벌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LG전자는 내비게이션이나 AV 등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및 냉난방 공조시스템은 물론 전기차 모터 제조 기술까지 확보하고 있다.
LG이노텍은 조향장치 모터와 센서를 완성차 업체에 납품중이며, LG CNS는 전기차 충전인프라 구축 사업을 육성중이다. LG CNS의 최근 설립된 자회사 에버온은 전기차 카셰어링(공유) 사업에 뛰어 들었다. 이밖에 LG하우시스는 범퍼와 카시트 등을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오너 대표가 경영권을 갖고 있는 LG전자가 이번에 브이이엔에스를 자회사로 껴안으면서, 이 회사가 더욱 사업에 힘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사업 활성화 과정에서 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과의 협력도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국내 굴지 그룹 오너 3세들인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왼쪽부터)이 자동차 전자장치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요신문 DB
지난해 2월 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최대 모바일 전시회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12’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이 부회장이 해당 일정을 취소하고 갑자기 독일로 방향을 틀어 BMW와 지멘스 최고 경영진을 만난 것은 이 부회장의 이 사업에 대한 큰 관심을 엿볼 수 있었던 대목이다. 당시 이 부회장은 전기차용 배터리와 차량용 반도체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지난 3월 전기차 배터리 제조회사인 삼성SDI의 울산공장을 직접 방문하며 사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삼성그룹의 종합부품회사 삼성전기도 모터를 차기 주력사업으로 육성키로 결정하고 최근 모터전문 연구부서를 신설해 전기차용 모터 제어를 위한 인버터 개발에 착수하는 한편, 삼성토탈과 제일모직은 플라스틱 등 차량 경량화 소재를 생산중이다.
국내 완성차 업계의 선두주자인 현대자동차그룹도 지난해 4월 차량용 반도체 팹리스(설계) 회사인 현대오트론을 설립하면서 전장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완성차 업체인 현대차·기아차와 차량용 전장 회사인 현대모비스 외에 추가로 현대오트론을 설립하면서 영역 확대에 나서는 모습이다. 현대차그룹은 그동안 차량용 반도체를 사실상 전량 수입에 의존해 왔으며, 이런 이유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은 이번 사업에 각별한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사적인 자리에서 ‘호형호제’ 하는 사이로 알려진 이 부회장과 정 부회장, 국내 1·2위 재벌가 ‘황태자’ 간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가 펼쳐질 것으로 보여 재계가 더욱 주목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현대차그룹이 전기차 ‘레이EV’의 배터리로 기존의 LG화학 제품이 아닌 SK이노베이션 제품을 탑재하는 등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신사업의 경우 오너가 어느 정도 관심을 갖느냐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국내 대표 재벌들 간에 자동차 전장 시장을 두고 자존심을 건 치열한 경쟁이 예상 된다”고 전망했다.
한편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매킨지에 따르면 자동차 제조원가 중 전장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04년 19%에서 오는 2015년 40%까지 높아지면서 2000억 달러(약 230조 원)규모로 급성장 할 전망이다. ‘달리는 기계’에서 ‘달리는 전자제품’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 셈이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