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 이재용 전무(뒤)와 이건희 전 회장. | ||
1986년 보령제약에 입사한 김은선 회장은 사내 전 부서를 두루 거치면서 경영능력을 검증받았고 2001년 부회장직에 오르면서 사실상 그룹 경영을 주관해왔다. 김은선 회장은 보령제약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보령 지분 45%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 인사를 통해 김승호 회장의 4녀인 김은정 보령메디앙스 부사장 또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김은정 부회장은 지난해 5월 김은선 회장으로부터 보령메디앙스 지분을 매입하면서 지분율을 17.79%까지 높여 계열분리 관측까지 낳는 중이다.
2003년 정몽헌 회장 사후 부인 현정은 회장이 총수자리를 맡은 현대그룹서도 모녀간 경영권 승계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현정은 회장의 장녀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는 지난 2004년 현대상선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2006년 3월 IT 계열사 현대유엔아이 상무를 거쳐 이듬해 전무직에 올랐다. 올해 32세인 정 전무는 어머니 현 회장의 심중을 가장 잘 읽어낸다는 평가 속에 고속승진을 해왔다. 정 전무는 현대유엔아이 지분 9.1%를 보유해 현정은 회장(68.2%) 현대상선(22.7%)에 이은 3대 주주에 올라 있다.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현 회장 외아들 정영선 씨도 지난해 8월 현대택배가 갖고 있던 현대투자네트워크 지분 20%를 매입해 이 회사 개인 최대주주에 등극하며 눈길을 끌었다. 현대투자네트워크가 비상장 법인인 터라 정영선 씨 지분 매입 비용은 2억 원에 불과했다. 그룹 차원의 물량 몰아주기로 회사를 키워 상장을 통해 그 차익으로 정영선 씨가 핵심계열사 지분 매집에 나서는 구도를 그려볼 수도 있는 셈이다.
위의 경우처럼 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까진 딸들을 ‘분가’시켜 아들의 안정적 승계를 도모하는 것이 재벌가의 보편적 풍토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그룹 총수직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여동생 이명희 회장이 신세계를 따로 받아 분가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현재 삼성그룹의 경우도 지분 현황만 놓고 보면 이건희 전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당장 경영권을 꿰차는 데 걸림돌이 없다. 삼성그룹은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를 이루는데 이재용 전무는 삼성에버랜드 지분 25.10%를 보유한 개인 최대주주로 그룹 장악에 문제가 없다.
일각에선 각자 경영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내온 이 전무의 여동생들과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작업 간의 함수관계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재용 전무의 여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와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는 각각 삼성에버랜드 지분 8.37%씩을 보유한 상태다. 둘이 합하면 16.74%로 만만치 않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공시에 따르면 이부진 전무나 이서현 상무 모두 호텔신라나 제일모직 대주주 명부에 아직 이름을 올리지 못한 상태다. 일각에선 두 여동생이 지닌 삼성에버랜드 지분에 대한 대가를 그들이 몸담고 있는 회사 지분으로 보상해주면서 계열분리를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장녀인 신영자 부사장은 그룹의 주력인 롯데쇼핑을 ‘유통지존’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신 부사장의 롯데쇼핑 지분율은 0.79%에 불과하다. 동생인 신동빈 부회장(14.59%)에 턱없이 못 미친다. 신 부회장으로의 그룹 경영권 승계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향후 롯데쇼핑 내 입지가 불투명한 신 부사장의 분가 가능성이 줄곧 거론돼 왔다. 2007년 10월 신 부사장이 식품납품업체 롯데후레쉬델리카 지분 9.31%를 확보해 신 회장과 서미경 씨 딸인 신유미 씨와 함께 개인 최대주주에 올라 계열분리설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현대·기아차그룹에선 아들과 사위의 묘한 구도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정몽구 회장 차녀 정명이 씨의 남편인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은 2003년 10월 대표이사 사장 취임 이후 두 회사를 업계 1위로 키우는 수완을 발휘했다. 회사 규모 면에서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지난해 초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 정의선 사장이 실적부진 논란 속에 기아차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것과 비교되곤 한다.
얼마 전 있었던 정기임원인사를 앞두고 정태영 사장이 그룹 중앙무대로 들어와 중책을 맡을 것이란 관측이 나돌기도 했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경영권 승계과정에 필요한 세대교체 조타수 감으로 정태영 사장이 거론됐지만 결국 설에 그친 것이다.
정태영-정명이 부부는 지난해 3월 현대커머셜의 지분 30%를 기아차와 위아로부터 매입했다(정명이 20%, 정태영 10%). 현대커머셜은 2007년 3월 현대캐피탈의 상용차·건설장비 할부금융 영업부문을 떼어내 만든 계열사. 지난 12월엔 자산관리공사(캠코)가 보유하고 있던 현대카드 지분 5.55%를 현대커머셜이 매입하면서 몸 불리기에 나섰다. 일각에선 이를 정 사장 부부의 계열분리 수순 밟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세계에선 지난해 말 이명희 회장의 사위 문성욱 상무(신세계I&C 전략사업본부장)가 입사 3년 만에 부사장으로 승진해 눈길을 끌었다. 이명희 회장 딸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의 남편인 문 부사장은 2004년부터 신세계 경영지원실에서 부장으로 근무한 것을 시작으로 4년 만에 부사장직에 올랐다.
재계 일각에선 신세계 내에서 정용진 부회장이 구학서 부회장을 위시한 전문경영인들의 위세에 다소 눌려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올해 37세인 문 부사장의 그룹 수뇌부 입성은 총수일가 일원에 대한 배려 차원 외에도 이명희 회장 외아들 정용진 부회장에 대한 구원투수 격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