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포기한 한화그룹은 분위기 쇄신에 나섰지만 내부는 책임론으로 여전히 시끄럽다. 사진은 김승연 회장. | ||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놓고 산업은행과 막바지 협상을 벌이던 지난 1월 13일 김승연 회장은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 회장은 출국 전 M&A를 이끌던 금춘수 경영기획실장에게 사실상 ‘인수 포기’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월 22일 산업은행은 협상결렬을 선언했고 한화의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박탈했다.
일본에서 설 연휴를 보낸 김 회장은 1월 31일 돌아왔다. 김 회장은 일본에서 대우조선해양 인수 무산에 따른 대책 등을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후 김 회장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임원 수가 10% 줄어드는 등 승진 폭이 예년에 비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한화 측은 이번 인사를 “내실을 다지고 신사업 부문을 강화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또한 김 회장은 그룹 전 계열사에 “대우조선해양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김 회장이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한화의 지분을 사들인 것도 ‘일본 구상’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9일 김 회장은 한화증권이 보유하고 있던 ㈜한화 주식 170만 주(2.14%)를 509억 원가량의 사재를 들여 매입했다. 이로써 김 회장의 ㈜한화 지분율은 종전의 20.32%에서 22.46%로 늘어났다. 한화 관계자는 “오너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이번 지분 매입을 두고 ‘대우조선해양 인수 무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그동안 그룹 안팎 일각에서는 인수전 중도에 발을 뺀 김 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물음표가 제기됐었다. 이러한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그룹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분을 사들였다는 것이다.
김 회장의 지분 매입으로 그룹의 지배구조도 바뀌었다. 한화는 ‘㈜한화→한화석유화학→한화증권→㈜한화’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김 회장이 한화증권이 가지고 있던 ㈜한화의 지분을 전량 사들이면서 순환 고리는 끊어졌다. 대신 ㈜한화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인 지배구조를 갖추게 됐다.
동시에 금융지주사 탄생도 가까워졌다는 평가다. 한화증권이 ㈜한화로부터 벗어나게 됨에 따라 지주사 설립을 위한 형식적인 기반이 충족됐기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을 놓친 김 회장이 대한생명 한화증권 한화투신운용으로 이어지는 라인업을 바탕으로 금융업 강화를 모색할 것이란 게 재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반면 한화에서는 “(김 회장의 지분 매입은) 지주사 전환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이처럼 대우조선해양의 악몽에서 벗어나려 애쓰고는 있지만 인수 중도 포기에 따른 후유증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행보증금 3150억 원을 둘러싼 산업은행과의 법적소송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한화는 국내 최대 법률사무소인 김&장을 대리인으로 선정하고 소송을 준비 중인데 이것이 계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팽배하다.
이는 산업은행과 한화의 특수 관계에서 비롯된다. 한화는 산업은행과 산은캐피탈로부터 2조 원이 넘는 돈을 차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단기차입금. 따라서 만약 산업은행 측이 만기 연장을 거부하면 한화는 심각한 자금난을 겪을 수 있다. 이 때문인지 한화 내부에서는 ‘최대 자금줄인 산업은행과 굳이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소송 가능 기간(5년)이 아직 여유가 있어 신중히 검토해 보고 소송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이행보증금 중에서 잘해야 50% 정도를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산업은행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할 것 같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한화는 될 수 있으면 소송을 피하고 합의하는 쪽으로 산업은행과 협상을 계속해 나갈 방침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산업은행과의 소송을 무작정 그만둘 수도 없는 처지다. 이행보증금 손실에 따른 주주들의 배임 소송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진M&A연구소의 김영진 소장은 “선진국의 경우 M&A 실패로 기업이 손실을 입으면 주주들의 소송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따라서 한화는 주주들에게 최대한 돈을 돌려받으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화의 딜레마가 시작되는 것이다. 재계 일각에서 한화의 이행보증금 소송을 ‘할리우드 액션’이라고 보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대우조선해양 인수 포기에 따른 파장은 내부에서도 감지된다. 장기 리스크를 줄여 회사 측에는 긍정적일 것이라는 반응이 대다수인 가운데 ‘책임론’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M&A를 이끌었던 몇몇 인사들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행보증금 소송을 놓고도 의견이 엇갈리는 듯하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활동 반경을 점점 늘리고 있는 김 회장에게 임직원들의 융화라는 또 다른 숙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동진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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