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미래를 예견케 했던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이 지난 2월 4일 시행에 들어갔지만 그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자통법 추진 근거가 됐던 미국 IB들이 금융위기로 몰락하면서 IB 출현에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것으로 예견됐지만 새로운 금융투자상품 출시까지 늦어지면서 증권사들의 활동이 지지부진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자통법 연기론이 제기될 당시 자통법이 예정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발생할 것처럼 떠들어댔던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금융업종 간 칸막이를 제거하는 자통법이 시행에 들어갈 당시만 해도 각종 규제가 사라지면서 갖가지 신상품 개발과 판매로 증권사 간 생존경쟁이 치열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주를 이뤘다. 그렇게 자통법 시대가 막을 올렸지만 이러한 예상과 달리 증권사들의 활동은 저조하기 이를 데 없다. 그토록 증권사들이 외쳤던 상품개발 제한을 없앴음에도 실제 자통법 시대에 맞는 새로운 상품을 내놓은 증권사나 투신사는 거의 없다.
'자통법형' 상품 고작 두개
굿모닝신한증권이 자통법 시행 첫날인 4일 적극투자형 투자자에게만 판매하는 ‘더 랩 610 전환형’을 증권사들 중 처음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상품에 투자자 보호 내용만 강화한 것이어서 자통법 시대가 추구하는 새로운 상품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자통법에 맞는 상품을 내놓은 곳은 삼성투신운용과 미래에셋증권 두 곳뿐이다. 삼성투신운용은 2월 18일 서부텍사스산(WTI)원유 선물과 국내 우량채권에 투자하는 ‘삼성WTI원유 파생상품펀드’를 내놓았다. WTI원유선물이라는 새로운 상품에 투자하는 펀드로 자통법 시대에 걸맞은 금융투자상품이라는 평가다.
미래에셋증권도 국내에는 생소한 탄소배출권이라는 기초자산으로 만든 파생상품연계증권(DLS)을 출시했다. 자통법이 시행된 지 한 달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증권사들의 상품 출시는 이 두 가지가 전부다. 탄소배출권 파생상품을 내놓은 미래에셋증권도 물 대체에너지 날씨 등을 기초자산으로 한 ‘하이브리드 파생결합증권(DLS)’이나 국내외 도로, 교량, 수도시설 등에 투자하는 ‘대안투자(AI) 펀드’ 등 다른 상품들에 대한 출시는 아직 계획 단계다. 기후나 탄소배출권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DLS를 개발 중이라고 밝힌 한화증권 역시 구체적인 상품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다른 증권사들도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리버스 ETF, 실물 ETF 등 다양한 ETF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지만 실제 판매가 언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또 각종 기초자산으로 하는 신종 파생결합상품 등도 개발하겠다는 계획만 내놓았을 뿐 구체적인 상품개발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자통법 시행으로 신상품 개발이 가능해졌지만 투자자 보호도 무척이나 까다로워졌다. 새로운 상품은 기존 상품과 달리 날씨나 대체에너지, 사회간접시설 등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것인 만큼 위험도가 커졌고 이로 인해 계획과는 달리 실제 상품 개발과 판매까지의 시간이 장기간 소요될 수밖에 없다”며 “투자자에 대한 설명 의무도 강화돼서 기존 상품을 설명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새로운 상품을 내놓을 경우 일선 창구 혼선도 우려되는 것이 현실이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자통법 시행으로 기존에 있는 펀드의 약관을 바꾸고 설명서를 만드는 작업도 제대로 해내기 힘든 상태다”라며 “회사 내부에 자통법에 따른 새로운 체제가 안착된 뒤에야 신상품을 출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이처럼 신상품 개발이 늦어지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한 증권사 간부는 “신상품 출시가 늦어지는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지난해 터진 금융위기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각종 펀드 수익률이 급락하고 일부 펀드 가입자들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증권사들이 움츠러들었다”면서 “만약 이런 일 없이 자통법 시대가 열렸다면 온갖 종류의 신상품이 쏟아져 나왔을 테고 이후에 금융위기가 터졌으면 한마디로 금융시장 자체가 패닉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다행인 셈”이라고 말했다.
자통법 시행으로 증권사들이 ‘금융투자사’로의 영역확대가 가능해졌지만 실제 증권사라는 이름을 버리고 금융투자사로 변신하려는 움직임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선물업과 각종 투자업 등에 진출할 수 있는 장벽이 사라졌지만 기존에 쌓아온 브랜드 때문에 증권사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국투자증권은 금융투자사로 사명을 변경하는 방안을 고민했지만 최근 경기악화로 인한 마케팅 비용 부담과 브랜드 교체 위험 등 때문에 당분간 사명 변경을 보류하기로 했다. 삼성증권도 브랜드 변경에 따른 위험이 크다고 보고 사명 변경을 향후 시장 상황을 본 뒤에 논의하기로 한 상태다. 다른 증권사들도 대형 IB를 위해서는 증권사라는 한정된 이름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비용과 리스크 등을 감안해 당분간 증권사를 유지한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지지부진한 일들이 있는 반면 자통법에 맞춰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일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금자동입출금기(ATM·Automated Teller Machine)의 확대다. 한국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1개 증권사가 기존 은행전산망에 가입할 뜻을 밝혔다. 자통법으로 인해 증권사도 은행처럼 지급결제가 가능해지면서 고객을 잡기 위해서는 다양한 ATM 서비스가 필요하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자통법하에서 은행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증권사들은 다른 무엇보다 ATM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동양종합금융증권은 전국 150여 개 지점에 설치된 ATM을 대도시 핵심 상권이나 교통 요충지, 아파트 단지 등에 확대하기로 한 상태다. 메리츠증권도 지하철 및 편의점 현금지급기에서 CMA 카드나 증권 카드로도 24시간 현금 지급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하나대투증권 역시 현재 운용하고 있는 ATM 외에 추가 도입을 검토 중이며 한국투자증권 현대증권 SK증권 등도 ATM 확대 도입 시기 결정만을 남겨두고 있다.
지급결제 기능 재빨리 장착
또 하나는 펀드판매 자격증 준비 열풍이다. 5월부터 펀드를 팔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만큼 증권가는 3월 8일 자통법 시행 이후 처음 치르는 부동산펀드 및 파생상품펀드 투자상담사 자격증 시험 준비로 바쁘다. 기존 증권펀드투자상담사 자격증만으로는 주식형과 채권형, 혼합형 펀드만 판매할 수 있고 부동산과 파생상품, 특별자산펀드 등 자통법하에 출시되는 신상품은 각각 해당되는 자격증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삼성증권은 ‘자본시장법 온라인 테스트’, 하나대투증권은 ‘학점 마일리지 제도’를 도입하는 등 증권사들이 ‘몸만들기’에 바쁘다.
이의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