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원병 중앙회장은 앞장서서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막상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일부 내용에 반대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 ||
지난 2월 23일 과천정부청사에 위치한 농림수산식품부(농수산부) 회의실에서는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농수산위)가 주관하는 ‘농협법 개정안 공청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농협법 개정안을 만드는 데 관여했던 농수산부 직원들을 비롯해 교수 농민단체 등이 참여해 농수산위 의원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 공청회가 끝난 후 농협 안팎에서는 ‘농협법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대두됐다. 여·야를 막론하고 농수산위 의원들 대부분이 법안에 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와 몇몇 농민단체의 대표들도 개정안 중 일부를 수정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공청회에 참석했던 서필상 전국농협노조 위원장은 “모든 참석자들이 농협을 개혁해야 한다는 큰 틀에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합장 비상임화나 인사추천위원회 구성 등 각론은 고쳐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했다”고 귀띔했다. 농협법 개정에 사활을 걸고 있는 농수산부로서는 암초를 만난 셈이다.
장태평 농수산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이명박 대통령이 가락시장에서 농협을 강도 높게 비판한 이후 “조직의 명운을 걸겠다”며 농협개혁을 취우선 과제로 삼아왔다. 농수산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농협 개혁과 관련된 코너를 만들어 놓고 홍보를 하고 있을 정도다. 개정안 작성의 실무를 맡았던 김경규 농수산부 농업정책국장은 “이번 개정안은 협동조합 원칙에 맞는 것으로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당초 목표였던 2월 내 법안 상정은 이미 수포로 돌아간 상태다.
지난해 농협 임직원들의 비리가 잇달아 터지면서 변화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히 이루어졌고 정부의 의지가 강해 농협 개혁은 그 어느 때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런 개혁 기류가 최근 들어 후퇴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을 두고 농민단체들 사이에선 농협의 막강한 로비력이 빛을 발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동안 농협법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번번이 좌절됐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데 이번 역시 농촌지역 출신 의원들이 지역의 ‘표’를 의식해 농협 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조합장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는 비상임화 추진의 경우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반대하고 있다. 이는 ‘조합원들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다’는 조합장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공청회에서 김성수 한나라당 의원은 “농민이 직접 뽑은 조합장을 비상임화할 경우 업무 추진이 더딜 것”이라고 우려했고, 김우남 민주당 의원도 “전국에 56명의 비상임 조합장이 있는데 경영성과를 보면 상임조합장이 더 좋다”며 조합장 비상임화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했다. 일부 의원은 조합장의 경조사비 제한을 담은 규정에 대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중앙회장의 권한 축소를 놓고도 팽팽했던 찬반의견이 ‘반대’ 쪽으로 무게가 기우는 듯한 모양새다. 최규성 민주당 의원은 “농민들이 직접 뽑은 농협 회장을 무력화하기 위한 악법”이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유기준 한나라당 의원도 “회장 선거를 간선제로 한다고 해서 혼탁 선거를 방지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서필상 위원장 역시 “사실 지금도 조합장들이 뽑는 간선제나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더 투표인단 범위를 축소하면 농민의 뜻은 반영되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직선제로 선출됐던 회장들이 모두 비리 혐의로 구속돼 간선제 도입만큼은 유력시됐지만 이마저도 불확실해진 것이다.
개정안의 핵심이었던 회장 권한 축소와 조합장 비상임화가 반대 여론에 부딪힌 가운데 실제로 농수산위에서 이 두 조항의 삭제 혹은 수정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농수산위 소속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개혁 요구가 워낙 거세 민감한 부분이긴 하지만 잘못된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의원들의 일치된 생각”이라면서 “농수산부 측에 수정안 제출을 요구할 것으로 안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농협법 개정안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지자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농수산부에서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무리하게 개정안 상정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공청회에서도 정부의 ‘속도전’을 지적하는 의원들이 있었다. 지난해 입법예고와 의견수렴까지 끝낸 개정안이 있는데도 대통령 말 한마디에 내용을 바꿔 다시 제출한 정부의 ‘개혁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낙연 국회 농수산위 위원장 측은 “정부에서 서두른 감이 있다. 의원들은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는데 밀어붙이기만 하고 설득은 하지 않고 있다”며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농협 내부에서도 정부를 향한 불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인사추천위원회 도입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의 농협 장악 시나리오’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 인사로 구성된 인사추천위원회가 농협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농협의 한 관계자는 “늑대를 내몰고 호랑이를 들여온 격이 될 것이다. 농협이 정부 인사들의 낙하산 기관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계했다. 또한 회장 권한 축소와 조합장 비상임화 등에 대해서도 ‘조합원들의 의중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유명무실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농협중앙회도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최원병 회장이 앞장서서 ‘비상경영개혁위원회’까지 출범하며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막상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농협중앙회는 개정안의 일부 내용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들의 시선이 한창 따가울 무렵에 농업개혁위원회와 농수산부가 만든 개정안에 대해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밝힌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최근 실시한 자회사 사장 공모에서도 잡음이 나와 농협중앙회의 개혁 의지에 대한 논란은 더욱 커질 듯하다. 자회사 사장 공모는 지난해에 이어 최 회장이 개혁의 일환으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일부 사장직 내정설이 나온 데 이어 올해 역시 몇몇 인사가 하위권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고도 사장에 임명됐다는 말이 불거지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한 관계자는 “농협법 개정이나 자회사 공모 과정 등에서 나타난 농협중앙회의 모습은 개혁 작업이 허울뿐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