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신임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으로 선출된 최경환 의원(왼쪽 두 번째)과 김기현 의원(맨 왼쪽)이 지난 15일 오후 의원총회 개표결과가 발표된 후 경쟁자였던 이주영 의원(왼쪽 세 번째), 장윤석 의원(맨 오른쪽)과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지난 15일 오후,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이 치러진 국회 본청 246호실. 최경환-김기현 조, 이주영-장윤석 조에 대한 당 소속 의원들의 표심이 발표되던 순간, 가장 뒷자리에서 앉아 있던 김무성, 김태환, 한선교 의원 등 친박계 의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30~40표 이상의 큰 차이로 원조 친박이 압승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신박(新朴)’으로 급부상한 이주영 조를 불과 8표 차로 누른 것을 두고 씁쓸해했다는 친박계 의원들이 많았다. 이를 지켜보던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사실상 이주영-장윤석 조의 승리라 볼 수 있다. 아무리 박빙이라도 이 정도 차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중 최측근이라는 최 의원으로선 ‘부끄러운 승리’가 아닐 수 없다”고 꼬집었다.
잔칫집에 재 뿌릴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다들 입 다물고 있지만, 이 ‘8표 차’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즉, 4표만 움직였다면 동점이었다는 뜻이고, 5표면 역전이 되는 숫자다. 이미 경선 전 최 의원 쪽이 “110표 이상을 확보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일각에서는 이 의원 조가 출구전략을 찾고 있다는 말까지 회자된 상황이었다.
최 의원을 돕고 있는 현역 의원이 수십 명에 달한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원사이드(One-side, 일방적인) 경선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공공연했다.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정현 정무수석 등이 알게 모르게 청와대의 입김 역할을 했다는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의 경선 결과여서 신승은 더욱 놀라웠다는 것이 정치권의 반응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이렇게 분석했다.
“최 의원은 김 정책위의장 후보 덕을 본 것이고, 이 의원은 장윤석 의원을 정책위의장 러닝메이트로 내세운 자기 탓을 해야 한다. 다소 뾰족해 보이긴 하지만 김기현 의원은 정책위의장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장 의원은 검사 출신이고, 경제통이나 전략통의 이미지는 전혀 없다. 오히려 18대 국회에서 검찰 개혁 논란이 일었을 때 검찰 편을 많이 들었던 방패막이 이미지가 강하다. 이주영이 좋더라도 장윤석이 싫어서 표가 반감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최경환이 싫더라도 김기현이 낫다고 본 쪽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어쨌든 문제는 지금부터다. 박 대통령의 심복인 최 의원이 집권 여당의 원내를 장악했지만 그의 지휘가 일사불란하게 먹혀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새 정부 출범 후 일었던 정부조직개편안 처리 과정 논란, ‘구박(舊朴)’과 ‘어공(어쩌다 공무원)’만 심은 각종 인사 문제, 박 대통령이 말하면 곧바로 움직이는 각종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 등에 대해 ‘원조친박 외’ 인사들이 반기를 든 것이 이번 표심에 드러났다는 평가다. 영원히 박 대통령 주위를 맴돌며 곁불을 쬘 수 없다는 것이 “69명의 ‘신비주류’를 만들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다음은 한 TK(대구·경북) 출신 초선 의원이 사석에서 한 말이다.
“지난 1년 동안 초선들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선배 의원들의 의정 활동과 의정 외 활동을 지켜보면서 느낀 점이 많다. 사실 이번 원내대표 경선도 4선 의원(이주영)이 해 왔던 것을 굳이 3선 의원(최경환)이 나서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 선배들이 순리대로 하지 않는데 믿고 따라갈 후배는 없다. 이번 경선은 이제 ‘오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당내에서는 역설적으로 ‘최경환의 패인’을 분석하는 측이 많다. 이겼지만 졌다는 것이다. 그 첫 패인에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방미 중 성추행 사건이 있다. 윤 전 대변을 임명한 박 대통령에게 모든 화살이 빗발치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새누리당은 청와대의 잘못을 뒤집어쓰지 말자는 의지가 결합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원내대표를 뽑는 것이지 ‘청와대의 원내비서’를 뽑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초선 사이에 오갔고, 몇몇 중진 이상급 의원들도 동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정치권 인사는 “만약 경선이 사흘 뒤쯤 열렸다면 결과가 뒤집혔을 수도 있다”며 “그만큼 윤창중 사태에 대한 박 대통령과 친박계의 타격은 크다.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갈수록 ‘박근혜 외’ 진영에 유리하게 돌아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한구 전 원내대표 등 소위 친박계 핵심 인사들의 전횡에 건전한 견제심리가 작동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각종 법안이나 추가경정 등 예산이 의원총회라는 집합적 논의체계를 거치지 않고 일방통행식으로 이뤄진 것이 원조 친박 외 인사들이 뭉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원조 친박계를 보면 ‘모로 가도 박근혜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는 식의 고집이 엿보인다.
또 다른 ‘패인’은 경선 현장에 있었다. 경선 전 토론에서 최 의원이 말을 얼버무리고, 얼굴이 상기되는 등 대중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최 의원에게 당의 원내 간판으로서의 이미지가 부족한 반면 이주영 의원은 논리적인 공세를 펼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 이날 오전 열린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수도권이 지역구인 전병헌 의원이 선출된 것도 원인 중 하나다. 민주당이 수도권 정당화, 나아가 전국 정당화를 위해 호남색에서 벗어나고, 친노세력과 범주류 진영이 맥을 못 추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누리당 내의 수도권 출신 의원들이 위기감을 느꼈고, ‘PK(부산·경남)보다는 TK가 더 꼴통’이란 생각에 이 의원에게 표를 몰아줬다는 분석도 있다.
표심은 후보의 됨됨이에서부터 자신과의 인연, 이해관계까지 복합적으로 녹아들어간 결과물이다. 최 원내대표로선 앞으로 원내 지휘를 하려면 항상 69명의 의사를 물어야 할 판이다. 당내 과반인 초선들이 1년간 의정생활을 하며 국회 분위기를 파악했고, 수도권 지역구 의원들은 민주당과 안철수 세력에 불안해하고 있으며, TK 내부에서도 최 원내대표에 대한 반란표가 부지기수로 나왔다. 일각에선 “최 원내대표가 ‘박근혜 마패’로 영화를 누리는 것도 지금까지다. 최경환만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면 역풍을 맞을 공산이 크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이번 표심은 청와대를 향해서도 일종의 경고장을 날린 것이란 분석도 있다. ‘박근혜 장악력’이 집권 여당 내에서 77표, 즉 50%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선우완 언론인
친박도 비박도 아닌 ‘무대’ 조명
김 의원은 원조 친박이었지만 18대 국회에서 ‘팽박(烹朴)’ 내지는 ‘탈박(脫朴)’으로 분류됐고, 18대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도우며 친박계로 돌아왔지만 박 대통령이 그를 전격적으로 용서(?)하고 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친박계 주변인’이다. 그런데 새 정부의 삐걱거림이 점차 커지자 이제 김 의원이 나서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
지난 18대 총선 공천을 사실상 친박계가 주물렀다는 점, 그리고 새롭게 국회에 입성한 초선 의원들이 대부분 친박계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19대 국회 1년간 친박근혜계는 기세등등했다. 친이명박계와 소장파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고, 지금은 아예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태와 최경환 원내대표의 힘겨운 승리를 목도하며 친박계가 ‘움찔’했다. 지나친 듯했던 자신감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참에 박근혜 색깔을 빼고 “협조할 것은 하되 할 말은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도 말하되 청와대를 설득할 줄도 알아야 앞으로 계속 ‘여당질’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주영 조를 찍은 69명의 표심을 두고 정치권에서 “원조 친박에 대한 견제심리가 발동한 것”이란 해석이 있다. 특히 내년 6·4 지방선거는 친박계의 전횡이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정치권에 나설 후보군도 “친박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라는 경고장의 의미도 있다. 이런 당내 여론을 수렴하면서 친박도 비박도 아닌 인물군 중에 단연 김무성 의원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정치권 사정에 밝은 한 인사의 분석.
“사실상 지금의 새누리당 내에서 최경환은 ‘친박계 마지막 카드’라고 볼 수 있었다. 그가 압승해야만 친박계가 건재함을 알리면서 ‘나를 따르라’가 되는데 너무 초라하게 이긴 셈이다. 69명은 앞으로 언제든 황우여 당 대표를 비토할 수 있고, 최 원내대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눈은 김무성을 향하면서 말이다.”
김무성 의원도 윤창중 사태를 지켜보다 지난 16일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윤 전 청와대 대변인의 큰 잘못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성과가 빛이 바래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공직자 한 명의 비뚤어진 생각과 행동이 만든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 청와대 공직자는 금주 선언을 하는 등 결연한 각오의 일단을 보여줘야 한다.”
청와대의 전면적인 쇄신을 요구한 셈이다. 청와대 공직자를 향한 성토로 보이지만 행간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날은 여론조사기관 ‘리서치뷰’가 새누리당의 차기 지도자에 관한 여론조사(전국 성인남녀 1200명 대상 휴대전화 RDD 방식, 95% 신뢰수준, 오차는 ±2.5%포인트)를 한 결과 김무성 의원이 29.8%의 지지율로 1위에 꼽힌 날이었다.
그리고 패한 이주영 의원은 깨끗하게 결과에 승복하면 원내대표에 준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폼 나는 세력화는 아니더라도 개헌, 정치쇄신, 경제민주화 등 정책이나 이슈 중심으로 세력화가 가능하다는 평가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