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경제사절단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이건희 회장(왼쪽서 세 번째)이 돌아오자마자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설립에 소프트웨어 인력 양성 투자 계획까지 연이어 내놔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이 같은 투자방향은 이미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경제사절단과의 조찬간담회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창조경제를 한 단계 더 도약할 올바른 방향은 기초과학이 튼튼하고 소프트웨어가 뒷받침돼야 하는 것”이라고 밝혔던 만큼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3월까지만 해도 이 회장은 북한 리스크와 글로벌 경제전망의 불확실성이 크다는 이유로 투자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 LG그룹 등이 연초에 투자계획을 발표하던 분위기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삼성그룹이 투자를 주저했던 까닭은 새로운 투자처가 마땅치 않다는 점도 있었지만, 정부 출범이 늦어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그룹은 지난 4월에야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48조 1000억 원의 투자계획을 밝혔다. 이번에 내놓은 창조경제 연관 산업에 대한 투자 계획도 절묘한 ‘셈법’이 들어있다는 것이 재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삼성전자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스마트폰부문은 시장 점유율이라는 양적인 측면과 디스플레이 등 단말기의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애플을 능가할 정도로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애플과의 특허소송에서 보여주듯 아쉬운 부분은 소프트웨어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 삼성전자는 지난 2011년 말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인 하드웨어 제품력에 필적할 만큼 끌어올리라는 이 회장의 주문에 따라 수원사업장에 소프트웨어센터를 신설했다. 이어 지난해 말에는 기흥사업장에 부품부문을 위한 소프트웨어연구소를 설립했다.
소프트웨어 역량 제고뿐만 아니라 연관 산업부분 간 융합도 이 회장이 추구해온 경영 방향이다. 삼성전자, 삼성SDI, 제일모직, 삼성정밀화학, 삼성코닝정밀소재, 5개사가 참여해 오는 10월쯤 문을 열게 될 전자소재연구단지는 각 부문의 장점을 융합하는 투자 프로젝트다. 연구력을 한데 모아 반도체, 2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삼성 주력사업에 필요한 소재 기술을 개발하라는 것이 이 회장의 특명이었다. 올 12월에는 반도체와 LCD 등 부품부문을 통합하는 전자부품연구소가 화성사업장에 건립된다. 지난 14일 기공식을 가진 평택 고덕 삼성산업단지도 그런 전략이 들어있다.
결국 박근혜 정부가 산업간 융합을 강조하며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창조경제를 주창하고 나왔지만, 그와 거의 동일한 개념의 신성장 전략은 이미 삼성그룹이 추구해온 셈이다. 수년간 신성장동력 발굴에 역점을 둬온 삼성의 자체 경영전략과 창조경제의 방향이 부합했던 것이 이 회장이 선뜻 투자계획을 내놓은 진짜 배경이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박 대통령의 주문이 있을 때마다 계약직 직원들의 정규직 전환,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 비중 축소 등의 정책을 내놓았던 현대차그룹이나 SK그룹과는 달리, 가장 돈을 적게 들이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창조경제 힘 실어주기’가 완성됐다. 이 회장이 정부 출범과 함께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코드 맞추기’에 주저하는 듯 보였지만, 절묘한 타이밍을 골라 미국 순방길에 9년 만에 동행하며 정부의 경제정책에 적극 동참하는 모양새가 되도록 극적이고 치밀하게 연출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셈법과 화해모드가 지속될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한 대기업의 임원은 “6월 임시국회에서 논의될 경제민주화 법안들 중에 삼성의 목을 조일 법안들이 적지 않다”면서 “정부와 여당이 야당의 압박에 어느 정도 선에서 방어해주느냐에 따라 삼성과의 밀월관계 지속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 법안은 상호출자제한 대기업집단(자산 5조 원 이상)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신규순환출자 금지에 관한 내용이 담긴 공정거래법 개정안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미 지난 4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대기업 지배구조 개혁 차원에서 6월까지 입법화, 올해 말까지 시행령 개정 계획을 밝힌 바 있다.
2012년 기준 순환출자로 유지되고 있는 기업집단은 15개다. 현대자동차 롯데 등 대표적 기업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는데, 가장 위험한 순환출자 구조를 가진 대기업은 바로 삼성이다.
박웅채 언론인
‘망신살’ 청와대 분위기 반전 카드
삼성그룹이 미래과학재단 설립 계획을 발표한 지난 13일. 그 소식은 당일 오전 8시쯤에야 출입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전달됐다. 사전 예고 없이 투자계획 발표 일정이 고지되자 기자실에는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이미 지난 밤 한 경제지 가판에 ‘삼성, 창조경제에 7조 원 투자계획’이란 내용의 기사가 게재돼 확인을 요구했지만, 삼성 측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는 반박을 내놓은 상황이었다.
삼성 기자실뿐만 아니었다. 삼성이 투자계획을 발표하던 시각, 산업통상자원부 기자실에서도 갑작스럽게 윤상직 장관이 ‘방미성과 설명회’를 갖겠다는 통보가 전해졌다. 윤 장관의 브리핑 내용은 방미기간 중 청와대를 통해 전해진 소식보다 새로울 게 없었다. 그곳에서도 “왜 새로운 내용도 없는 브리핑을 갑자기 일정을 잡아 하게 됐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윤 장관은 즉답을 피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은 경제사절단의 방미성과 설명회를 자청했던 전경련에서도 벌어졌다.
이에 대해 한 관계자는 “12일 청와대에서 ‘윤창중 스캔들’에 대해 박 대통령이 13일 사과를 하기로 결정했을 것이고, 그런 만큼 분위기 반전을 위해 해당부처와 기업(삼성, 전경련)에게 방미성과를 설명하고, 투자계획을 발표해달라는 요청이 동시다발적으로 전달됐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라고 전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