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경제민주화 법안의 잇단 국회 통과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과도한 경제민주화가 비용 부담과 경영차질을 빚어 투자는 물론 실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논리다. 하지만 증권가의 평가는 다소 다르다. 경제민주화 법안이 기업 실적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는 평가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 동안 강화된 공정거래법 등 기업 관련 규제에도 불구하고 기업실적은 개선추세를 보였다는 이유다. 규제 환경보다는 기업 실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경기상황과 본질적인 제품경쟁력을 투자의 일차 판단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의도 증권가 야경. 일요신문DB
최근 국회를 통과한 유해물질관리법은 사고 발생 시 법인 매출액의 최대 5%, 개별 사업장 매출액의 최대 2.5%를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자칫하면 회사 문을 닫을 수 있다며 반발했다. 하지만 증시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늘어난 과징금 위험을 줄일 수단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시각이다.
익명의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해운회사가 운행 중인 배가 침몰했다고 망하지 않는다. 보험을 통해 위험에 대비하기 때문”이라며 “유해물질 관리와 관련해서도 약간의 비용부담 증가는 있겠지만 보험 등을 통해 잠재 위험부담을 줄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기업 측의 관리 강화로 예측 불가능한 사고위험이 그만큼 줄어드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민주화법 1호로 불리는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서 하도급 대금의 최대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가능토록 한 데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이미 있어왔던 제도인 데다, 다만 손해배상 최대한도가 기존 2배에서 50% 늘어난 것일 뿐 이어서 새로운 규제라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중소형주 펀드를 운용하는 한 펀드매니저는 “지금까지 부당한 하도급 대금에 대한 과징금으로 망했다거나 경영난을 겪었다는 대기업을 본 적이 없다”며 “처벌 수위가 높아진 만큼 오히려 부당한 하도급 관행이 줄면서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형 업체의 사업 위험이 줄어 투자 매력을 높이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고 기대했다.
정년 60세 연장 역시 재계는 인건비 부담을 우려하고 있지만, 급격한 고령화 과정에서 내수 부진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정년이 늘어나지만, 사실상 임금피크제로 인건비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 또 인건비 부담이 경영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도 기업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력 구조조정이 가능하다”며 “강성 노조로 인한 인건비 부담은 완성차 등 일부 대기업에 국한된 얘기일 뿐이며, 그나마 이들 대기업들은 자동화와 글로벌 생산체제를 갖춰가면서 인건비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고 꼬집었다.
재계가 가장 민감해하는 순환출자 규제에 대해서도 증권가는 대기업 눈치를 살피느라 내놓고 반기지는 못하지만, 내심 기대까지 하는 눈치다. 현재 정부와 여당은 신규 순환출자 금지를, 야당은 기존의 순환출자까지 강제하는 법안을 주장하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최고투자책임자는 “사실 순환출자 이슈는 대기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총수 일가의 문제”라며 “결국 계열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보유한 지배력을 총수 일가가 직접 사들이라는 뜻인데, 기업의 본질가치 훼손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순환출자 해소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기 때문에 기업들도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다”고 정리했다.
실제 순환출자의 대명사인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구조인데, 정몽구 회장 개인 지배력이 가장 큰 곳은 현대모비스다. 상호출자제한을 피하려면 결국 기아차가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을 정몽구 회장 일가가 사들이면 된다.
외국계 자산운용사 매니저는 “한국 기업의 경우 순환출자나 우회출자, 비상장사를 통한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꽤 강한 편인데, 순환출자 해소 과정에서 그 지배력이 약화된다면 그동안 주가에 반영되지 않았던 경영권 프리미엄이 드러나면서 주가가 더 오를 수 있다”며 “아울러 시장으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총수 일가의 노력도 더욱 배가돼 기업 전반적인 체질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좋은 사례가 경제민주화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금융계열사의 비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방안이다.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삼성그룹이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다. 이 방안이 제도화되면 이건희 회장 일가는 삼성생명을 통한 삼성전자 지배력이 약화되는 만큼 직접 삼성전자 지분율을 늘리거나, 다른 계열사들의 삼성전자 지분을 확대해야 한다.
특히 이 회장보다 삼성전자 지분율이 떨어지는 이재용 부회장으로서는 보유 중인 다른 계열사 주식을 팔아서라도 지배력을 확대해야 하며, 다른 주주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도 경영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 일반 투자자로서는 총수 일가 지배력 강화 과정에서 주가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
가장 뜨거운 이슈 가운데 하나인 일감 몰아주기 규제 역시 일반 투자자에게 미치는 악영향보다는 긍정적 효과가 더 크다는 분석이다. 한 물류담당 애널리스트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의 핵심은 결국 총수 일가가 세운 개인 기업에 그룹의 일감을 몰아주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지, 회사의 사업기회와 이익을 강제로 회사 밖으로 빼내라는 뜻이 아니다”라며 “일반 투자자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게 총수 일가로 새던 기업 가치를 돌려받을 수 있게 됐고, 총수 일가의 정상적인 지배력 강화 과정에서 장기적인 주가 상승의 기회까지 노릴 수 있는 셈”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4월 임시국회가 지난 7일 추가경정예산 처리를 끝으로 문을 닫은 만큼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의 법제화는 6월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약 한 달여 동안 정치권과 재계의 줄다리기도 치열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열희 언론인